명의 중앙관제에는 네 가지의 분명한 특징이 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특징은 승상제도를 폐지했다는 점이다. 명 초기에는 원의 제도를 따라 중서성과 승상을 두었다. 홍무 13년(1380)에 명 태조는 원말 승상의 권력이 황제를 폐위하고 옹립할 만큼 비대해졌던 것을 거울삼아 명의 승상 호유용이 권력남용으로 정치를 어지럽히자 그를 죽이고 즉각 중서성을 폐지토록 선포하는 동시에 승상을 파면하고 설치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오래 동안 중국 역사상에 존재했던 재상제도가 폐지되었고 명청 500여년 동안 재상이 없는 군주전제체제를 추진하였다. 승상을 폐지한 후 명조의 중앙기구는 다시 조정하여 육부를 기본으로 하고 府,部,院,寺(=司)가 정무를 분담하여 처리하는 행정골격을 형성하였다.

육부의 서열은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 순이었다. 수당에서 명초까지 6부가 비록 중앙의 중요 부분에 속했지만 황제에게는 직접 속하지 않았고, 상서성에 예속되었거나 중서성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직권이 비교적 큰 제한이 있었다. 승상을 폐지한 후 6부는 황제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주로 처리하는 중앙의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다. 이부는 문관을 관리하는 기구로써 그 아래에 문선(文選)․험봉(驗封)․계훈(稽勳)․고공(考功)의 4사(司)를 설치하였다. 호부는 토전․호구 및 국가재정을 관리하는 기구이다. 아래에 13사를 두었으며 그 이름은 명대의 지방 13성구(省區)의 명칭과 서로 대응한다. 각 사는 또 민(民)․탁지(度支)․금(金)․창(倉)의 4과로 나누었다. 호부의 창고는 태창(太倉)이라고 했는데, 명조의 국고(國庫)였다. 예부는 예의와 교화를 주관하는 기구로, 아래에 의제(儀制)․사제(祠祭)․주객(主客)․정선(精膳)의 4사를 설치하였다. 병부는 군정을 주관하는 기구로 아래에 무선(武選)․직방(職方)․거가(車駕)․무고(武庫)의 4사를 설치하였다. 형부는 형정을 주관하는 기구로, 아래에 13사를 두었고, 그 이름은 호부와 같았다. 공부는 건설공정을 주관하는 기구로, 아래에 영선(營繕)․우형(虞衡)․도수(都水)․둔전(屯田)의 4사를 두었다. 6부의 장관은 상서(尙書)이고, 부관은 좌․우 시랑(侍郞)이며, 똑같이 정관(正官) 혹은 당상관(堂上官)으로 불렸다. 사(司)는 청리사(淸吏司)라고도 하며 낭중(郎中)․원외랑(員外郞)․주사(主事)를 두고 똑같이 속관으로 삼았다. 낭중을 정랑(正郞)으로 보았고, 원외랑을 부랑(副郞)으로 보았다. 또 사무(司務)를 설치하고 수령관(首領官)으로 삼아 부 내의 여러 사무를 책임졌다. 『대명회전大明會典-홍치간범례弘治間凡例』에 “본조에서 관직을 설치함에 있어…비록 문무가 함께 설치되었지만, 정치적인 일은 모두 문직에 귀속시켰다”고 하였다 이부는 문관을 관리하는 기구로 6부 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았다. 각 부와 각 사의 권력은 정직(正職)의 손안에 집중되었는데 『명사明史-안계조전顔繼祖傳』에 “6부의 정치는 상서에서 관할하였고, 제 사의 업무는 정랑이 장악하였고, 시랑 및 부랑은 그 주된 일이 서열에 배석하여 문서상 결제를 해 주는데 그쳤다”고 하였다.

부(府․)원(院․)사(司․)사(寺)는 6부와 서로 호응하는 기구이다. 예부와 관련된 기구로는 종인부(宗人府)․태상시(太常寺)․광록시(光祿寺)․홍려시(鴻臚寺)․행인사(行人司)․국자감(國子監)․흠천감(欽天監)․태의원(太醫院)․교방사(敎坊司)․승록사(僧錄司)․도록사(道錄司) 등이 있었다. 종인부는 황실의 호적 및 옥첩(玉牒,황실종보)의 찬수를 주관하였다. 명초에는 종인령(宗人令)․좌우종정(宗正)․좌우종인(宗人)을 설치하였다. 이후에는 관직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공신의 친척들이 부의 일을 관할하였다. 태상시는 예부의 사제사와 관련되는 기구로 각종의 제사․예악 활동을 주관하였다. 광록시는 예부의 정선사와 관련된 기구로서 공물로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연회와 궁정음식을 관장하였다. 홍려시는 예부의 의제사․주객사와 관련된 기구로서 조정의 의례․손님접대와 관리의 접견 임무를 관장하였다. 3사는 모두 경(卿)․소경(小卿)․사승(司丞) 등의 정관을 두었다. 주부(主簿) 혹은 전부(典簿)가 수령관이었고, 속관이 구체적인 업무의 관원이었다. 태상사의 다른 하나의 직무는 사이관(四夷館)을 지휘 감독하는 것이었다. 사이관은 외국 및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기구였다. 행인사는 외국으로 나아가는 사신의 일을 주관하였으며, 사정(司正)․좌우사부(司副)․행인(行人)을 두었다. 국자감은 최고의 학부로서 좨주(祭酒)․사업(司業) 등의 정관을 두었다. 수령관은 전부(典簿)였고 속관에는 감승(監丞)․오경박사(五經博士)․조교(助敎)․학정(學正)․학록(學錄)․전적(典籍)․장찬(掌饌) 이 있었다. 흠천감은 역서를 편제하고 천문기상을 관찰하는 기구를 관장하였으며, 감정(監正)․감부(監副) 및 각종 전문인을 두었다. 태의원은 의료와 위생 사업을 관장하는 기구로서 원사(院使)․원판(院判)․어의(御醫) 등의 관직을 두었다. 교방사는 악무를 주관하였고 봉란(奉鑾)․좌우소무(韶舞)․좌우사악(司樂) 등의 악관을 두었다. 승록사는 천하의 불교도를 관장하였으며, 좌우선세(善世)․좌우천교(闡敎)․좌우강경(講經)․좌우각의(覺義) 등의 승관을 두었다. 도록사는 천하의 도교도를 관장하였으며, 좌우정일(正一)․좌우연법(演法)․좌우지령(至靈)․좌우현의(玄義) 등의 도관을 두었다.

병부와 관련된 기구로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와 태복사(太僕寺)가 있다. 명초에는 대도독부를 설치했는데, 원조의 추밀원(樞密院)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승상을 폐지한 후 대도독부는 중․좌․우․전․후 오군도독부로 바꾸고 오부(五府)라고 약칭하였다. 오부는 각각 좌우도독(都督)․도독동지(都督同知)․도독첨사(都督僉事) 등의 정관을 설치하고 병적 및 천하의 도사위소(都司衛所)를 관장하였다. 오부의 정관은 모두 무관이다. 위소 중 어떤 것은 수도에 설치하였고, 어떤 것은 지방에 설치하였다. 수도인 경사는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고 전국의 도회지 소재지에는 위소의 설치가 가장 많았고 경위(京衛)라고 하였다. 경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오군도독부의 관할로서 모두 33위이며 주 임무는 경사의 호위 및 경성 각 문의 순시이다. 둘째, 상직위(上直衛)는 친군위(親軍衛)라고도 했으며, 처음에는 12위를 두었지만 나중에 26위까지 불어났고 주요임무는 교대로 숙직하며 궁성을 호위하는 동시에 경성을 각 문을 순시하는 책임을 겸하였다. 셋째, 15위가 있는데, 공부 등의 각 기구에 각각 편입되어 장인과 황제의 능을 호위하는 책임을 졌다. 각 위는 또 정예 병사를 선발해서 지방에서 북경으로 교대해 와서 훈련하는 군대와 경영을 이룬다. 경영(京營)은 군사편제인데 삼대영(三大營)이라고도 하며 오군영(五軍營)․삼천영(三千營)․신기영(神機營)이 바로 그것이다. 삼대영은 각각 제독태감(提督太監)․무신(武臣)․장호두관통령(掌號頭官統領)을 두었다. 각군은 각각 좌영관(坐營官)․파총(把總)․좌사관(坐司官)․감창내신(監槍內臣)․파사(把司)․파패(把牌) 등을 설치하였다. 경태 연간에 경영을 단영(團營)으로 바꾸었다. 가정 연간 삼대영을 회복시켰는데, 대장 한 명이 통솔한 것을 총독경영융정(總督京營戎政) 이라고 하였으며, 문신 한명이 보좌한 것을 협리경영융정(協理京營戎政) 이라고 하였다. 아래로는 부장(副將)․참장(參將)․유격(遊擊)․좌격(佐擊)․좌영(坐營)․호두(號頭)․중군(中軍)․천총(千總)․파총(把總) 등을 두었다. 오부는 병부와 권력을 나누었다. 병부는 군정을 관할하여 인사이동과 출병에 관여하였으나 구체적으로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다. 오군도독부는 병적을 관할하였으나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고, 전시에는 황제가 별도로 총병관(總兵官)을 파견하여 통솔하게 하였다. 태복사는 마정(馬政)을 관장하는 기구로, 경(卿)․소경(小卿)․사승(司丞) 등의 정관을 두었다. 형부와 관련된 기구로는 대리시(大理寺)․도찰원(都察院)이 있는데 이를 합쳐서 삼법사(三法司) 라고 하였다. 대리시는 형벌과 옥사를 재심의하여 오류를 바로 잡아주는 기구였다. 다시 말해 형부가 심리한 안건은 대리시의 재심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리시의 정관에는 경(卿)․소경(小卿)․사승(司丞)이 있었다. 아래에는 좌․우로 나누고, 각각 사정(寺正)․사부(寺副)․평사(評事) 등의 관직을 두었다. 좌사(左寺)는 양경(兩京)의 오부(五府)․육부(六部)․경위(京衛) 등 아문(衙門)의 형사 사건을 책임졌고, 우사(右寺)는 순천(順天)․응천(應天) 양부와 남북의 직예위소․부주현과 재외 포정사(布政司)․도사위소(都司衛所) 의 형사 안건을 책임졌다. 도찰원은 사법에 대해서도 감찰의 권한이 있어 중대한 형벌과 송사는 종종 삼법사가 공동으로 심사하였다.

도찰원의 전신은 어사대였는데, 승상이 폐지된 후에 없어졌다. 홍무 15년 (1382)에 처음으로 도찰원을 설치하였다. 도찰원은 최고감찰기구이다. 좌우도어사(都御史)․좌우부도어사(副都御史)․좌우첨도어사(僉都御史) 및 행성에 따라 구분한 13도 감찰어사(御史로 약칭)를 두었다. 도찰원을 풍헌아문(風憲衙門) 이라고 했으며, 정치쇄신과 법령정비를 직무로 삼았다. 도어사는 육부의 상서 지위와 서로 같았고 합쳐서 ‘칠경(七卿)’이라고 하였다. 어사의 품계는 높지 않았으나 권위는 있어 조정에서 중앙의 각 관서를 감찰하고 모든 관아의 관리들의 악정을 탄핵할 수 있었다. 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하는데, 순안(巡按, 순시와 위무)․청군(淸軍, 군대 점검)․제독학교(提督學校, 학교 감독)․순염(巡鹽, 염전 순찰)․차마(茶馬, 차와 말의 순시)․순조(巡漕, 운송선 순시)․감군(監軍, 군대 감찰)․둔전(屯田, 주둔병의 농사 순시) 등의 직무가 있었다. 그 가운데 순안어사는 천자를 대신해서 지방을 순시했는데, 지방 각급 기관장을 감찰하고 탄핵할 권력이 있어서 중요한 상황은 황제엑 주청하여 처결하도록 했고, 일반적인 일은 자체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밖에 또 통정사사(通政使司)가 있다. 이것은 명조에 창설한 기구이다. 황제 명령의 출납을 관장하고 내외의 장주를 수리하여 천자의 “목구멍과 혀 같은 관청(喉舌之司)”으로 불리었다. 통정사(通政使)․좌우통정(通政)․좌우참의(參議) 등의 정관을 두었다. 칠경(七卿)에 대리시경(大理寺卿)․통정사(通政使)를 더해 ‘구경(九卿)’으로 합칭하였다.

두 번째 특징은 내각제의 확립이라는 점이다. 명 태조는 승상을 폐지한 후에 직접 육부와 백사(百司)를 지휘하여 친히 독단하였지만 사실은 무척 처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비서처(秘書處)’를 두어 황제를 도와 정사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홍무 15년(1382)에 명 태조는 송조의 제도를 모방하여 화개전(華蓋殿)․무영전(武英殿)․문화전(文華殿)․문연각(文淵閣)․동각(東閣)에 대학사(大學士)를 두고서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 라고 통합하여 불렀다. 이후에 인종(仁宗) 홍희제(洪熙帝)는 또 근신전대학사(謹身殿大學士)를 증설하였다.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 때 화개전을 중극전(中極殿) 으로 바꾸고, 근신전을 건극전(建極殿) 으로 바꾸니 모두 4전2각이 되었다. 그러나 홍무 때의 전각대학사는 고문(顧問)이 되었을 뿐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명 성조 영락제가 즉위한 후에야 정식으로 황제와 육부 사이에 내각이 성립되었다. 각(閣)은 문연각을 가리키며, 오문(午門)의 안, 문화전(文華殿) 남면에 있었고, 위치는 궁 안에 있었다. 각의 신하는 또 황제를 전각의 아래에서 항상 보필하며 재상의 이름을 피하였기 때문에 내각(內閣)이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한림관(翰林官)을 선출하여 입각시켰고 점차 학사와 대학사로 승진되었으며 보통 5명에서 7명이었다. 후에 상서․시랑 이 전각대학사에 제수되어 문연각에 들어가 일을 처리하게 되자 그 지위가 높아졌다. 명 중엽 이후로 각의 업무를 주재하는 대학사를 수보(首輔) 라고 불렀으며, 그 나머지에 차보(次輔)․군보(群輔) 라고 하였다. 내각의 직책은 “황제에게 옳고 그름을 주청하는 고문(顧問)역할을 하고, 비답(批答)을 초안하는 것이다 (獻替可否, 奉陳規誨, 點儉題奏, 票疑批答)”(『명사明史-직관지職官志』). 헌체가부(獻替可否) 가 바로 고문(顧問)이 되는 것이고, 봉진규회(奉陳規誨) 가 바로 임금의 덕을 보필하는 것이고 제주(題奏) 는 공용의 주문(奏文)과 개인의 주문을 가리킨다. 명조는 공사에 있어 황제에게 보이는 본장(本章)을 제본(題本)이라 하였고, 다른 일 때문에 황제에게 보이는 본장을 주본(奏本)이라고 하였다. 표의(票擬)는 표지(票旨)․조지(條旨)․조첩(調帖) 이라고도 하는데 육부백사의 제주가 상정되면 내각은 황제의 지시에 근거하여 비문(批文, 임금의 대답)을 초안하는 것을 가리킨다. 초안은 붓으로 작은 표 위에 썼기 때문에 그래서 표의(票擬) 라고 한다. 어떤 이는 내각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승상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첫째, 내각대학사는 집정하지 않았고, 권력을 잡은 쪽은 육부의 상서였다. 둘째, 내각대학사들은 각자 권력을 분할하였다. 셋째, 내각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표의(票擬)(초안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표의(票擬)는 황제의 의지에 따라 엄격히 만들고 황제의 지시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하달될 수 있었다. 그래서 명대의 내각대학사 섭향고(葉向高, 1559- 1627) 는 “선왕 때 내각의 신하를 두었지만 문학으로 시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중요성도 표의(票擬)에 그쳤고, 그 위임된 권력도 전대의 재상과 절대로 같지 않았다”『명 인종실록 권511』고 총괄하였다.

내각과 관계가 밀접한 것으로는 두 가지의 기구가 있다. 한 가지는 중서과(中書科)․상보사(尙寶司)․육과(六科) 이다. 이 세 기구는 내각과 똑같이 모두 황궁 안에 설치해서 금직(禁直) 기구라고 하였다. 금직은 궁중에 들어가 숙직한다는 의미이다. 중서과는 중서사인을 두고 서사(書寫)의 사무를 많아 처리하였다. 당대 중서성에 속한 중서사인의 지위와 서로 비할 수는 없다. 상보사에는 경(卿)․소경(小卿)․사승(司丞)을 두어 옥새 같은 신물을 관장하였다. 육과는 이․호․예․병․형․공 육과의 약칭이다. 각 과에는 도급사중(都給事中)․좌우급사중(左右給事中)․급사중(給事中)을 두었다. 급사중도 소관(小官)으로 시종(侍從, 관원의 시중을 듦)․규간(規諫, 규정에 의거 간언함)․보궐(補闕, 미진한 부분을 보완함)․습유(拾遺, 관원의 과실을 바로잡음)․육부백사 의 일을 계찰(稽察, 검열) 하는 직무를 관장하였으며, 황제의 칙명과 신하의 장주에 대해 봉인하고 반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급사중은 어사대와 합쳐 과도관(科道官)․대성관(臺省官)․언관(言官)․대쇄청반(臺瑣淸班) 이라고도 하여 자못 조정을 좌지우지 할 수 있어 명조의 정치 무대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였다.

다른 한 기구는 한림원․첨사부(詹事府) 이다. 한림원은 조정에서 전문적으로 문장의 일을 맡는 기구로서, 제고(制誥)․수사(修史)․문한(文翰) 등의 일을 책임졌다. 학사(學士)․시독학사(侍讀學士)․시강학사(侍講學士)․시독(侍讀)․시강(侍講)․오경박사(五經博士)․전적(典籍)․시서(侍書)․대조(待詔) 등의 관직을 두었다. 또 사관수찬(史館修撰)․편수(編修)․검토(檢討) 및 서길사(庶吉士) 가 있었다. 한림원은 명조 때에는 품계가 높지 않았으나 지위는 낮지 않았다. 내각의 구성원은 모두 한림 출신이었다. 서길사는 한림원에서 연수하는 진사로서 훗날 내각에 들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 의해 “저상(儲相)”으로 불렸다. 첨사부는 황태자를 지도하는 기구로써 첨사(詹事)․소첨사(少詹事)․부승(府丞) 등의 정관을 두었고 아래에 좌우춘방 (左右春坊)과 사경국(司經局) 을 두었다. 춘방관에는 대학사(大學士)․좌우서자(庶子)․좌우유덕(諭德)․좌우중윤(中允)․좌우찬선(贊善)․좌우사직랑(司直郞)․좌우청기랑(淸紀郞) 이 있고, 태자와 상관되는 각종의 사무를 분담하였다. 사경국에는 세마(洗馬)․교서(校書)․정자(正字) 등의 관직을 두었고, 도서의 정리와 출간을 책임졌다. 한림원과 첨사부의 관원은 항상 모두 두었던 것은 아니고 종종 서로 겸하였고 모두 내각의 지도를 받았다.

세 번째 특징은 환관의 관아는 정부기구를 능가하였다는 점이다. 명조의 환관기구는 24아문 이라고 불렸고, 12감 4사 8국으로 구성되었다. 12감은 사례감(司禮監), 내관감(內官監), 어용감(御用監), 사설감(司設監), 어마감(御馬監), 신궁감(神宮監), 상선감(尙膳監), 상보감(尙寶監), 인수감(印綬監), 직전감(直殿監), 상의감(尙衣監), 도지감(都知監) 이다. 4사는 석신사(惜薪司), 종고사(鐘鼓司), 보초사(寶鈔司), 혼당사(混堂司) 이다. 8국은 병장국(兵仗局), 은작국(銀作局), 완의국(浣衣局), 건모국(巾帽局), 침공국(鍼工局), 내직염국(內織染局), 주초면국(酒醋麵局), 사원국(司苑局)이다. 처음에 각 감에는 태감(太監)․소감(少監)․전부(典簿)․장수(長隨)․봉어(奉御) 등을 두었고, 각 사에는 사정(司正)․사부(司副)를 두었으며, 각 국에는 대사(大使)․부사(副使)를 두었다. 이후에 24아문은 모두 장인태감(掌印太監)을 두었다. 태감이라는 단어는 명조에서 가장 높은 일급의 환관을 가리켰고, 아래에 소감(少監)․감승(監丞)․봉어(奉御) 등이 있었다. 인장을 관장(掌印)하는 직무이고 기타 직무명칭에는 제독(提督)․병필(秉筆)․수당(隨堂)․관리(管理)․장사(掌司)․사자(寫字)․첨서(僉書)․감공(監工) 등이 있었다. 같은 태감이 되면 장인할 수 있고, 제독․병필․수당․관리․첨서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례감에는 장인태감 외에도 제독태감․병필태감․수당태감이 있다. 24아문은 홍무 말년에 기본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영락 연간에 환관을 이용해 군민의 숨겨진 일을 정탐하기 시작하였다. 선덕 연간 이후로 내각이 초안하는 것을 제약하기 위하여 사례감의 직위를 높였는데, 24아문의 으뜸이 되었다. 사례감이 황제를 대신하여 붉은 붓으로 내각의 초안을 비준했던 것을 “비홍(批紅)”이라고 하였고, 황제의 명령을 대신 전달하는 것을 “중지(中旨)”라고 하였다. 사례감은 또 동창과 금의위(錦衣衛)를 통제하였다. 동창(東廠)은 정탐과 체포를 관장하는 특무기구로서 영락 18년(1420)에 처음 설치되었다. 흠차총독동창관교판사(欽差總督東廠官校辦事) 한 명이 있었는데 총독동창(總督東廠) 또는 제독동창(提督東廠) 으로 약칭하였으며,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병필태감(장인태감이 하기도)이 겸임하였다. 제독동창의 아래에 장형천호(掌刑千戶)․이형천호(理刑千戶)․장반(掌班)․영반(領班)․사방(司房) 등을 두고 당두(檔頭) 백여명 과 번역(番役) 천여명을 거느렸는데, 모두 금의위가 파견하였다. 당두와 번역은 외부에서 정탐하고 체포가 가능하였는데, 위로는 관부, 아래로는 민간에까지 모두 그들의 종적이 있었다. 이후에 서창(西廠)과 내행창(內行廠)의 설치가 있었지만 동창처럼 오래가지는 않았다. 금의위(錦衣衛)는 홍무 15년(1382)에 설치하였고, 경위 중의 친군위 에 속하였으며, 아래로는 17개의 천호소를 관할하였고, 황제가 신임하는 훈척(勳戚, 국가에 공훈이 있는 임금의 친척) 도독이 통솔하였다. 금위위 아래에 또 북진무사(北鎭撫司)를 두고서 전문적으로 조옥(詔獄, 칙명에 의해 죄수를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였다. 조옥은 황제가 친히 처리하는 중대한 형옥을 가리키며, 삼법사의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명조의 사람들은 “임금의 개인적인 형벌(人主私刑)이라고 하였다. 명 중엽 이후로 금의위는 사례태감의 연고자가 나가 담당하였기 때문에 창(廠)과 위(衛)가 서로 결합하여 독립적이고 또한 완벽한 사법감찰 계통을 구성하였다. 중국역사상 명조 환관기구의 방대함과 설치의 완벽함은 전무후무하여 관료기구와 서로 필적하기에 충분하였다. 황제가 다소간 간섭하는 상황 아래 두 계통은 서로 견제하고 저울질하는 역할을 통해 황권을 강화하였다. 반대로 황제가 되어 정사를 게을리 하거나 권력을 남용할 때, 두 계통은 바로 상호보완 작용을 하였다. 환관은 황제의 가노(家奴)였기 때문에 황제와 더욱 가까웠고 그래서 설사 권신이 조정을 통제하고 있다고 해도 환관의 힘 역시 뭉쳐서 흩어지지 않았고 은폐되어 쇠퇴하지도 않았다.

네 번째 특징은 북경과 남경에 각각 중앙기구를 하나씩 두었다는 점이다. 중국역대왕조는 주로 양경 혹은 다경제(多京制)를 시행하였다. 명조도 양경제를 시행하였는데, 명 성조가 북경으로 천도하자 남경은 남겨진 도읍지라는 의미에서 유도(留都)라고 불렸다. 전대와 다른 점은 남경에 완벽한 중앙기구를 남겼다는 점이다. 양경기구에 같은 점은 바로 남경에는 내각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고 오부․육부․도찰원․대리시․통정사사 등의 기구를 두었던 것이 같으며, 관원의 품계도 똑같았다. 다른 점은 남경의 각 기구 정원이 북경보다 적었다는 것인데, 정관은 일반적으로 보좌직을 두지 않았다. 예를 들면 육부에 좌시랑을 두지 않았는데, 도찰원에 좌도어사를 두지 않은 것과 같았다. 속관으로 둔 관원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전부 두었던 것도 아니었고 책임과 권한도 북경보다 작았다. 어떤 것은 모형식(模型式)의 기구로써 남경의 첨사부․종인부 등이 있었으며, 설사 모형식의 기구가 아니라고 해도 직무는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다. 그래서 명조의 관리들은 남경관을 한직으로 보아 북경에서 남경으로 전근되면 좌천된 것으로 보았다. 남경관의 핵심은 남경수비(南京守備)․협동수비(協同守備)․수비태감(守備太監)․참찬기무(參贊機務) 등의 관직으로 구성되었다. 사무처는 남경중군도독부(南京中軍都督府) 에 설치하였고 수비청(守備廳) 이라고 불렀다. 남경수비는 공․후․백 이 맡았고, 협동수비는 후․백․도독 이 맡았으며, 참찬기무는 남경의 병부상서가 겸임하였다. 남경의 병부상서는 핵심에 들어갔기 때문에 “오부 중 특별하고 막중한 것으로 보았다『만력회전萬曆會典 권158』”. 남경수비태감은 사례감이 지방으로 가서 근무하는 관계로 천자의 “삼천리 바깥의 근신(三千里外親臣)”이라고 불렸으며, 임무는 남경관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수비청 이 회의할 때 태감은 통상 “상석을 차지하였다(據首席).『봉주잡편鳳州雜編 권1』”. 명조에서 처음 남경수비태감에 임명되었던 사람은 바로 일곱 번이나 서양을 다녀온 적이 있었던 세계 항해사에 거대한 공헌을 한 정화였다.



- 왕천유, 『중국의 고대관제』, 이상천 역, 학고방, 2006.

by Mr. Trollope 2011.01.12 2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