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종교라는 것, 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다. 초등학교 때 근처에 있는 교회에 잠깐 다닌 일이 있고, 중학교 때는 친구가 함께 성당에 나가자고 권해서 몇번 나가기도 했다. 군대에서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성당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 특히 군대처럼 읽을만한 꺼리가 부족한 곳에서는 더욱 -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중국에 와 있는 이 지금, 현재, 성당을 다니고 있다. 하지만 내게 독실한 신앙이 있느냐고 한다면 그건 글쎄올시다-이다. 무엇보다도 첫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신이 존재할까.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무엇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확인한다는 것은 내가 찾고자 하는 것 A를 내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상 B와 비교해서 그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뜻이다. 바로 대상은 내가 확인하기 전에, 곧 선험적 개념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미리 알고 있지 않다면, 결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바다 너머에 대륙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륙'이라는 개념이 먼저 전제되어야 하며, 바다를 건너 넘어가면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대륙이 액체로 되어 있어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닌다고 생각했으면, 바다를 건너지 않을 것이다. 대륙이 투명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바다를 건너지 않을 것이다. 위치가 고정된 땅덩이가 있어 그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그래야 우리는 바다를 건너 대륙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방법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원리가 이것이다. 과학을 잘 알지도 못하는 문돌이가 이걸 설명하려고 하니 참 힘이 든다. 어쨌든, 원리는 이렇다. 눈에 보이지 않는 A가 있는데,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시약 B를 넣는다는 것은, 시약 B를 투입했을 때 A 안에 있는 어떠한 성질 a가 있어, 이것이 B를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A 속에 a의 성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그걸 눈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두가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리에는 눈으로 확인 가능할 수 있는 성질이 없다. 눈으로 확인하건, 전파를 쏘아 보내든, 시약을 넣어 검출하는 방식이든, 원리는 같다. 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신이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고스트 버스터즈는 한때 과학이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던 시대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유령은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유령이 움직임으로써 가구가 흔들리고, 거리가 파괴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유령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기 불꽃을 쏘면 유령을 붙잡을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유령은, 전기는 힘이든 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등 뒤에 메고 있는 기계에서 나오는 뭔가를 쏘면 맞는다. 결국 고스트 버스터즈에 나오는 유령은, 유령의 성질 속에,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전기나 또는 뭔지 알 수 없는 전파를 만나면 여기에 반응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어떤 성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성질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잘난척하지 마라. SiFi 영화란게 다 그렇다. 영화에서는 배경지식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유령을 포착 가능한 뭔가 과학지식의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다. 결국 그렇다. 이 때는, 인류가 결국은 유령도, 신도,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유령이든 뭐든. 그것 역시 우리가 밝혀낸 어떤 성질 A, B, C... 가 섞여 있는 어떤 무언 것이리라는 기대. 마치 DNA 구조처럼, 그것이 굉장히 복잡하긴 하겠지만. 결국에는 과학적 설계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고. 이제는 다른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냐. 회의주의가 득세한 것은 훨씬 전의 일이다. 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이미 철지난 소리에 불과하다-고. 나도 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다른 종류의 과학, 유사 과학이다.
영화 속에서 번쩍거리면서 전기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뭔가를 쏘아 내보내는 것은, 영화 속 유령에 대한 과학적 연구 기초는, 영화 속 빌 머레이가 연기하는 피터 뱅크만은 심리학 전공이다. 그리고 중성자 총이건 어쨌건 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건, 전기 불꽃을 쏘면 뭔가 맞을 것이라는 생각, 이것은 그냥 유비추론일 뿐이다. 이렇게 하니까 다른 곳에서 저렇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 것이다 라고 관객으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사용된 영화적 장치일 뿐이다. 연극에서 사용하 듯이, 널판지 하나를 갖다 놓고 이게 왕의 침실이라고 우기는 그런 종류의 장치 말이다.
<아이언맨>에서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공학기술이 현대의 기술과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 궁금하다. 최소한 불꽃만 번쩍거리면서 쏘아대면 뭐든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속인다면, 그게 과학은 아니라는 것만 안다. 가슴팍에 거대한 발전기를 달고 있는데 형광등처럼 된 것이 뭔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면서 웅웅거리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된댄다. 아이언맨이 손바닥에서 쏘아대는 리펄서 건 역시 마찬가지다. 원리는 설명해주지 않고 또 설명할 생각도 없지만 그럴듯하게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짜잔! 전기불꽃만 전부가 아니다. 아이유의 <너랑 나>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타임머신은 톱니바퀴로 만들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계적, 규칙적, 필연적 이미지를 가진 톱니바퀴로 만들어졌으니까 (타임머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믿는다는게 아니라) 그럴듯 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아이유를 욕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찌 감히!) 아이언맨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언맨 3편 모두는 정말이지 끝내주는 영화다. <고스트 버스터즈>를 봤을 때나 <쥬라기 공원>을 봤을 때,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를 봤을 때 전부, 전부, 기절할 정도로 좋았다. 영화의 기술수준과 현재의 기술수준에 차이가 있다고 잘난 척 하려는 것도 아니고, 영화 안이건 영화 밖이건 불철주야 기술개발에 매진하는 과학자들을 매도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런 영화적 장치 등이 불러 일으키는 오해, 즉 뭐든지 전기불꽃을 튀기면서 열과 소리만 내면서 이게 과학이다 라고 말하려는 그런 오해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과학은 자연계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 지식들로 이루어진 체계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아직 알아내지 못한 지식을 결합시키는 정교한 방법론이다. (이게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불꽃만 튀기는 것은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바로 종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과학은..."
by 빈센트 마수카 (미드 <덱스터>에서)
고대부터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야할 때, 패러다임의 공백이 발생할 때, 그것을 메울 책임을 짊어진 것이 바로 종교였다. 해는 왜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질까? 당시의 과학으로는, 당시에 알고 있는 지식을 결합시켜서 나올 수 있는 한계 내에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하늘을 건너는 배가, 빠른 발을 가진 신이, 늑대가 등장했다. 이러한 설명도 역시 유추를 바탕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서, 종교의 영역은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동굴 속에서 낮과 밤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던 인간이 인공적인 불을 밝힘으로써, '우주의 질서'를 거역한 이래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는 결코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대학원생들 역시 같은 형벌을 받는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 바다 너머에 절벽이 없다는 것 등등. 종교의 설명을 과학의 설명이 대체했다.
누군가는 현대인이 덜-종교적이다 라고 하겠지만, 또한 누군가는 현대인이 더-종교적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교회를 찾고, 절을 찾는 사람이어야만 종교에 기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또는 합리적 이해를 추구하기 보다는 알 수 없는 무지의 영역으로 남겨두려는 태도, 간단하지만 비과학적인 해답에 만족하려는 태도 또한 종교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뭔가 경이적인 사건, 수천만 분의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이야기 라든가, 몇년 뒤의 사건을 맞춘 이야기 등, 이른바 '성지글'에는 온갖 종교적인 간증이 넘친다.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남자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 경전/교회/신도 삼박자가 다 갖춰져야만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면 보답이 발생한다고 믿는 것, 이것 역시 종교이며, 뭐든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발생했을 때 신비로운 무지에 만족하는 것, 이것 역시 종교이다.
누군가는 과학과 종교가 별개의 영역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종교전쟁을 두려워한 타협의 산물일 뿐이다. 왜냐면 아직까지, 아무도,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는 사실은 일단 제껴두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해야 할 지 아무도 모른다. 신이 무엇인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이 과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고 때문에 과학과 종교가 별개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과학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일 뿐이다.
<포세이돈 어드벤쳐 (The Poseidon Adventure, 1972)>
하지만,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더이상은. 한때 종교를 업신여긴 적이 있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종교를 가질 수가 있느냐며, 펄펄 뛰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되물리고 싶다. 종교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뭔가가 내려와서 지상을 쓸어버린다거나, 불꽃이 번쩍하면서 소금기둥을 남겨놓고 도시를 증발시켜버릴 수 있기 때문에 신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다. 신앙을 가진 자가, 혹은 누군가 신의 존재를 믿을 때, 정말 굉장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볼케이노>에서 다른 사람을 들고 용암 위를 걷는 소방관이나, <포세이돈 어드벤쳐>에서 (정작 목사는 신을 욕하지만) 끊어진 다리가 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그런 일들. 이런 것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이런건 영화에서나 기억하는 것일 뿐이다. 다만 현실상에서도 이런게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신부는 실존인물이며, (Thomas Byles)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다른 영혼을 위로하다가 목숨을 달리한 그의 행적 또한 사실이다. 믿음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신앙간증회에서 이른바 '방언'을 내뱉는 사람을 보라. 나는 그들이 정말 신과 접촉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신이 신과 닿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만들어내는 정신착란이다. 꿈을 꾸는 것과 같다. 뇌에서부터 폭포처럼 흘러나오는 호르몬이 만들어 내는 화학작용일 뿐이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그 사람이 그것을 강하게 믿고 혹은 간절하게 믿고 그래서 그토록 강력한 믿음이 그에게 너무나도 강력한 추동력을 제공해 준다면 나는 종교의 힘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믿음의 변화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사후세계를 믿지 않음에도, 그래도 그런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영혼이 신체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온전하게 남아 있고, 그래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영혼이 우리가 아는 물질이라면 질량이 있을 것이고, 사람이 죽는 순간 영혼이 빠져나가는 순간을 포착하여 질량을 계량할 수도 있겠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있지만. 나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치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우승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 간극, 지식과 믿음 사이의 간극 때문에 이런 영화를 본다. 얼마 전에 영화를 다시 찾아서 봤다. 어렸을 때 이 영화를 보면서 혹은 드라마를 보면서 한번이라도 영화 속 장면을 따라하지 않은 아이가 있었을까. 그리고 꿈을 꾼다. 언젠가 이루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또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가능하기를 바라는 순진한 소망 때문에. 그것을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람에, 오랫동안 이 영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다.
'Review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뮌헨 - 전쟁의 끝자락에서(Munich Edge of War, 2021) (0) | 2022.01.31 |
---|---|
소사(小史) : 안옥윤(1911? - ?), 영화 <암살> (0) | 2015.10.05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1975) (0) | 2015.04.26 |
인 더 하우스 (Dans la maison, In the House, 2012) (0) | 2014.08.12 |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The Fall, 2006) (0) | 2014.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