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나이가 처음 나왔을 때,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나를 비롯한 많은 군필자들 또한 열광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남성들이 가진 공통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획이 만들어졌구나, 억눌린 기억을 양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열렸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어떤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난 뒤에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겠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이건 '가짜 사나이'다. 이제는 예비역치고 이걸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마 육군 관계자나, (앞으로 군대를 가야 하는) 청소년이나, (앞으로도 군대를 갈 필요가 없는) 여성들이나 즐기는 프로그램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물론 (군대에 관한 모든 것이 추억이나 영웅담으로 남은) 나이든 어르신들도 빼놓아선 안되겠지. 왜일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군필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재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고통은 예비역들이 전혀 공감할 수 없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데, 출연자는 고통스럽다며 울부짖고 있는 모양새니 그냥 차라리 비웃어 주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그리고 군대(처럼 보이는 캠프)에서 뭔가를 배웠다는 듯이, 뭔가 성숙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면 또한 미쳐버릴 것 같다.
군대를 경험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몇몇이 말하길, 군대에서 느끼는 고통은 육체적인 괴로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 사나이가 '가짜 사나이'의 기획이 되어 버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군대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완전군장의 행군이 힘들고 선임의 갈굼이 힘들고 행여나 있을 내무부조리의 가혹행위가 힘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깨에 메고 있는 군장을 벗어던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 선임의 갈굼에 맞서 대응하지 못하는 것, 내무 부조리를 고발하고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규율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사나이'라고 말하는 이 프로그램 속에는 그런 게 없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이 진짜 고통스러운 훈련일지 몰라도 그들은 언제든지 프로그램을 그만둘 수 있고, 아프면 쉴 수 있고, 힘들면 주저앉을 수 있다. 그들을 그곳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은 프로 연기자라는 윤리의식이고 출연료를 받아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존에 대한 욕구일 뿐이지 대부분의 군필자가 경험한 군형법의 공포가 아니다. 출연자들을 구속하는 것은 프로그램을 때려치겠다는 그런 용기만 있으면 된다. 연기자들(이렇게 부르는게 적절하다)은 직장을 옮기겠다는 식의 용기가 (물론 이것도 쉽지 않다) 필요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강하게 구속되어 있는 것처럼 연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리와 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연기한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게 개소리라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왜 저 낮은 위병소의 문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나 나는 왜 나를 괴롭히는 K병장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지 못했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마법처럼, 평소에는 규칙과 규율이라는 친근한 이름을 하고 있지만 정작 영외로 벗어나는 순간, 선임을 폭행하는 등 선을 넘는 순간 군형법이라는 무시무시한 처벌로 다가오는 그런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구속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우리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 힘이 이끄는 대로 육체적인 고통 속에 몸을 적셔야 했다.
설마 이것은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사람의 의도가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정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마치 무대 뒤에 기계신의 팔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도전과제를 주는 것이 달처럼 보이는 스튜디오에서 명령을 내리는 누군가의 기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고통과 도전을 마땅히 감내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또 그것을 이겨내고 (사실은 참는 것 뿐이다) 그것을 극복하면 (사실은 무대 뒤에 숨은 PD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 뿐이지만) '어른스러워'지고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된다고 가르친다.
여군특집에 오게 되자 이런 생각이 더욱 더 강해졌다. 물론 혜리는 참 이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 속에서규율과 훈육을
학습했고 그 결과 보다 강인해졌다고는 전혀 믿지 않는다. 나는 여자 교관이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남성교관의 행동을 흉내내고 그걸 여성 출연자들에게 학습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꼴보기가 싫다. 모두가 그렇게 이유없이 강인하고 굳센 '남성'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난 그런 이유같은 건 모른다.
이 프로그램에서 남는건 결국 한가지 뿐이다. 임의의 강제를 규칙과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는 무형의 권력이야말로 진정한 폭력이란 사실 말이다.
'Review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스트 버스터즈 (Ghostbusters, 1984) (0) | 2015.10.26 |
---|---|
소사(小史) : 안옥윤(1911? - ?), 영화 <암살> (0) | 2015.10.05 |
인 더 하우스 (Dans la maison, In the House, 2012) (0) | 2014.08.12 |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The Fall, 2006) (0) | 2014.03.21 |
변호인(The Attorney, 2013) (0) | 2013.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