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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

by Mr. Trollope 2012. 6. 15.

어제 페이스북을 돌다가 재밌는 그림을 봤다.






"반딧물의 묘" 작가의 에피소드라던가 최승호 시인의 일화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뜻 이 말이 맞는 것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댓글을 보면서 나는 반지성주의 그리고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라는 옛날 웹툰을 떠올렸다. 


먼저 저 그림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 내가 국문과 전공도 아니고, 그게 뭐 중요하나 싶다. 뭘 깊게 파고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 문학선생님의 원이 여러개였으면 맞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학선생님 A가 이야기하는 원 하나, 문학선생님 B가 이야기하는 원 하나, 문학선생님 C가 이야기하는 원 하나... 이 세개의 원이 겹치는 공통된 부분에 작가가 의도했던 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 위대한 작품이라면 문학선생님이 그리는 원의 N개가 많아지게 되고, N개가 많을수록 그 작품은 위대한 작품인 것이다. 국문과 전공 이야기를 괜히 한게 아니다. 이 내용은 이대로만 짚고 넘어가고. 그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첫번째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난 솔직히 이런 태도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 다양한 해석을 존중해달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다양한 해석을 막는건 그들 자신들이다. 지식권력을 독점하는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고 소리 높이는 그들이 자행하는 폭력이다. 


두번째는 앞서 이야기했던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라는 웹툰이다. 


이 웹툰의 내용은, 한 아이가 산낙지를 쉽게 먹는걸 보고 어른들이 신기해 했더라. 그렇게 관심을 얻은 아이는 좀 더 꿀떡꿀떡 산낙지를 집어먹었고 TV까지 타게 된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아이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재능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산낙지는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그런 것'임을 깨닫고 공황에 빠진다. 심지어 산낙지가 자기를 '쓰레기'라고 부르는 환영을 경험하기까지 한다. 어른이 된 아이. 회사 면접에 갔을 때 면접관이 묻는다. 자네는 특기가 뭔가? 머뭇거리다가 산낙지를 잘 먹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면접관은 자신은 구구단을 잘 외는 것이 특기라고 말하고는 자신도 그 아이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 좌절에서 자기계발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고 지금은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너는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인생을 게을리한 쓰레기라고 면박을 준다. 멘붕에 빠진 아이는 도망쳐 나오고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서 산낙지를 주문한 다음 여러 마리를 한번에 삼켜 자살하고 만다. 


라는 내용이다.


이 웹툰의 줄거리를 설명할 때 내가 주인공을 계속 '아이'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이것이 내가 이 웹툰을 해석하는 방식이고, 내가 그리려고 하는 하나의 동그라미이다. 이 웹툰에 대한 다른 사람의 블로그를 몇개 살펴보긴 했지만 혹자는 이렇게 이해하기도 하고 혹자는 다르게 이해하기도 한다. 동그라미는 여러 개가 그려질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이 웹툰이 매우 잘 만들어진 웹툰이라고 생각한다. 이 웹툰을 보면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이 웹툰을 그린 작가가 이것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스러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패닉에 빠져 버렸다. 그 때야 알았다. 아, 작가 자신이야말로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였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위대한 작품일수록 해석의 동그라미의 수가 늘어난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정말 작가는 "커튼은 존나 파란색이었다"를 쓰고 싶었기 때문인 경우이다. 어떤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의도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집어내서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해석과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허락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산낙지를 잘 먹는 아이'의 작가가 남긴 말을 볼 때 작가는 이 작품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즉 작가의 생각은 정말 커튼이 존나 파란색이었다는걸 표현하는데 그치는 경우. 이건 정말, 정말, 작가가 코딱지만한 세계에 그치고 그 바깥의 세계를 모르는 경우다. 위대한 작품은 인간에게 그가 가진 가장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허락하는데도, 정작 그것을 창조한 작가 자신이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커튼은 존나 파란색이었다"


이건 존나 비극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