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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4

한족 최후의 왕조 남명南明(1644-1661) 1644년 3월 19일 북경이 점령되고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약 한달 가량이 지난 뒤 4월 중순 즈음에야 남경에 도착했다. 숭정제의 뒤를 이어 황제를 세워야 마땅한 첫번째 적임자인 황태자는 이자성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남경에 남아 있는 신하들은 다음 황제의 재목을 종실 중에서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남경은 명대의 2번째 수도였기 때문에 비교적 완전한 정부기구가 남아 있었으며, 또한 강남은 이미 천하에서, 아니 당시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청나라에 대항해 제대로 된 왕조를 건설하기에 어려운 점 역시 존재했다. 첫째, 정권의 구성이 복잡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명은 먼저 북경에서 피난을 온 관료, 기존에 남경에 배치되었던 관료, 강.. 2013. 1. 11.
명말의 환관 위충현 위충현(魏忠賢) (1568-1627) : 본명은 위사(魏四), 본래 肅寧(지금의 하북성 남부) 사람이다. 명말의 유명한 환관으로 천계제의 총애를 받아 동창과 금의위를 장악하고, 문인 집단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숭정제가 즉위하자 명을 받고 좌천되었고, 가는 길 위에서 자살했다. 명사(明史) 권305 환관전2에 그의 전이 있다. 그의 악행이야 뭐 너무 유명하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고 다만 그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의 일과, 그리고 그 후의 나머지에 대한 내용만 할까 한다. 입궁 그는 일찍이 결혼한 적이 있는데 부인의 성은 풍씨였고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싸움에 소질이 있어, 왼손과 오른손 모두 능숙하게 활을 쏠 줄 알았다. 집안이 빈궁하였으나 도박을 무척 좋아하여 많은 돈을 .. 2012. 2. 6.
명청시대 중국여성의 여행활동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누구나 여행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교통이 불편하던 고대에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평소에는 겪을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직접 유명한 명승지를 찾아본다는 것은, 현재보다도 훨신 어렵고 사치스러운 활동이었다. 명대 말기는 여행이 대단히 큰 유행을 얻었던 시기였다. 당시에는 수많은 여행 관련된 서적이 출판되어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은 여행 안내서 류의 책이었다. 역사학자 周振鶴의 통계에 따르면, 명전기와 중기에 나타난 여행기의 수량은 다소 적지만 嘉靖(1522-1566)연간 이후로 점차 늘기 시작하여 萬曆(1573-1620) 이후에는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문인 사대부가 지은 여행기 이외에도, 보다 대중적인 여행안내서가 등장하여, 만력 37년(1609)에 출.. 2011. 6. 10.
명 인종 홍희제 인종(仁宗) 홍희제(洪熙帝) 주고치(朱高熾). 1378-1425. 명 조 4번째 황제로서 영락제(永樂帝)의 장자로 태어났다 영락(永樂) 2년 (1404) 황태자가 되었으며 영락 22년 (1424) 제위에 올랐다. 이듬해 연호를 홍희(洪熙)로 정했다. 재위 기간은 1년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홍희제가 마련한 정책과 업적은 뒤를 이은 황제들이 수성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는 평을 받는다. 주고치는 1378년 8월 16일 명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장자로 모친은 서황후로써 개국공신이었던 서달(徐達)의 딸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인 연왕(燕王) 주체(朱棣)의 나이는 겨우 18세였다. 주고치는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문예를 좋아하여 그가 비록 활쏘기 등의 무예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이기도 했지만, .. 2010.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