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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한 편

by Mr. Trollope 2010. 11. 23.
예전 안암에서 본 일이다.

늙은 대학원생 하나가 교수연구실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누런 색 소프트 커버 논문 한 편을 내 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논문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지도교수의 입을 쳐다본다. 지도교수는 대학원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논문을 이리저리 펴보고 '좋소' 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논문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교수연구실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그 논문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논문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교수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논문을 어디서 베꼈어?" 대학원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써주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두꺼운 논문을 대신 써줍니까? 들키면 쪽박은 안 차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대학원생은 손을 내밀었다. 교수는 웃으면서 '좋소' 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교수의 확인 도장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 보는 것이다. 거친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종이꾸러미를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논문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 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어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베낀 것이 아닙니다. 남이 대신 써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따로 발표할 자리를 줍니까? 학술지 논문 한 편을 발표해 본 적이 없습니다. 소논문 한 편 발표할 기회도 백에 한 번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편 한 편 얻은 발제문에서 몇 쪽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글 여섯 편을 소논문 한 편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다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석사논문' 한 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논문을 얻느라고 이 년하고도 여섯 달이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논문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논문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논문 한 편이 갖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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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석사 논문이 통과된 후배가 싸이에 남긴 글

이 글을 읽고 나도 울고, 후배도 울고, 함께 읽던 과사무실 전원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