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심은 '도서관 책에 코멘트 달기'로 쓰고 싶지만. 약간 과하게 적어 본다.
먼저 분명하게 말하자면, 난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다 코멘트를 한다거나 낙서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예전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이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얼마전에 듀게에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한번 나왔다) 혹자는 좋아하고 혹자는 싫어한다면 하지 않는게 맞다 라는 평소의 신념에 따라, 빌린 책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책에 코멘트를 다는 것 - 각주를 다는 것, 띠지를 붙이는 것, 포스트잇을 붙여놓는 것 - 의 장점을 설파하는 행동까지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왜 빌린 책이냐면, 내 책은 그 다음 독자가 없으니까.)
같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거나 혹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책의 지면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논쟁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책에 손을 대는 것은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책의 목적을 훼손시키는 행동이자 방해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반론이 있다. 일단 경우를 나눠보자.
첫째 책에서 저자가 인용한 사실에 오류가 있는 경우 혹은 역자가 명백한 사실을 오역한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예를 들어 (최근에 후배가 발견해서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이다)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의 39쪽 "중국은 일종의 식민 통치 기구와 유사한 흠천감에 의존했는데" 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에서 '흠천감'이라는건 명백한 오역. 이런 곳에 두줄을 긋는 행동은 아니더라도 띠지나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은 어떨까. 이런건 분명히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며 책의 본뜻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저자(역자) 본인이 저지른 경우이다. 혹자는 제3자의 해석으로 책의 내용에 손을 대는 것은 책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게 무슨 실록도 아니고.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치기어린 행동의 위험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난 책을 좀 더 함부로 다루길 원한다.
둘째 책에서 저자가 전개한 논지 혹은 견해에 반대되는 의견이 있을 경우. 예를 들어 "이슬람교는 폭력적 전교를 근본 원리로 한다"라는 주장을 했다고 치면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책의 여백에 적는 행동, 포스트잇을 붙여 코멘트를 다는 행동도 과연 거부되어야 할까. 책이 독자로 하여금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막는 것이 아닐까. 책의 순수성을 훼손하지 않는다(책의 본문을 건드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 덧대는 행동을 막는 것은 오히려 책이 갖는 장점의 하나를 죽이는 행동이 아닐까. 책을 단순히 일방향의 전달 매체로 규정하고 그 과정에 개입하는 모든 행동을 장애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순수주의가 아닐까.
책은. 단 한가지 판본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한가지 형태만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책이 가진 장점은 더 많은데 왜 현대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책만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문자가 인류의 역사를 만든 이래 텍스트는 인간이 가진 지식을 전달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전달만이 그 유일한 기능이 아니었고 지식의 가공과 재생산 역시 텍스트가 할 수 있는 기능 중의 하나다. 정보의 전달을 가로막을 위험만 없다면, 책이 그 다음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책에 내용을 덧대는 것마저 거부할 필요는 없다.
또한 책은 좀 더 함부로 다뤄줄 필요가 있다. 반지성주의의 득세, 로고스의 사망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텍스트는 주요한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서의 지위에서 추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왜 책은 그대로 보존되어야만 하는가. 활자로 남겨졌다는 것이 그것을 완전하게 남겨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책 속에 담겨져 있는 수많은 정보가 쪼개지고 합쳐지고 재가공되어야 하는 것도 책이 가진, 인쇄물이 가진 중요한 기능이다. 그걸 내가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할 이유가 있는가? 조또 모르는 놈이 멋대로 건드리면 어쩌나? 라고 한다면 왜 자격을 나누려고 하느냐 무엇을 자격으로 규정하냐고 묻고 싶다. 그러면 당연히 자격을 구분할 기준은 없다고 하겠지. 그러니까 하지 말자고. 니가 모르면 건드리지 말라고. 내 대답은 그거다. 우리가 조또 몰라도 일단 건드리자. 그것이야말로 인문학의 강점이다. 홉스봄이건 월러스틴이건 개나 소나 건드릴 수 있다는 것. 왜 그걸 포기해야 하나. 나는 알지도 못하면 떠들지 말라 라는 주장이 근본주의 또는 교조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경계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인문학과의 거리감을 낳고 반지성주의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해답은 이거다. 책을 하찮게 다루자는 것. 막 다루자는 것. 개나 소나 책에 낙서하고 지지고 볶자는 것. 책의 내용이 사라지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