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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Film

그래비티(Gravity, 2013)

by Mr. Trollope 2013. 12. 6.




"인간은 하나의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연 중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무찌르기 위해 전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무찌른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192종은 온몸이 털로 덮여 있지만 단 한가지 별종이 있다. 그의 조상은 4-5만년전 그 윗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이 별종이 지구상에서 거둔 성공은 아마도 유례가 없을 정도다. 이들은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나갔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털없는 원숭이, 인간이다. 우리는 원숭이다. 지구의 주인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원숭이다. 우리는 아직 이 지구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쨌든 땅 위에 있어야 하고 하늘 아래에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 원숭이는 우주를 난다.


혹자는 신앙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인간이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고독과 후회의 정서를 드러냈다고 한다. 라이언 스톤은 한번도 기도를 해본 적 없고, 누구도 그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준 적도 없다. 소유즈에 갇혀 절망에 빠지자 죽음을 생각하고 그제서야 자기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람도 없고 위로해 줄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일한 대화 상대는 우연히 연결된 지구의 누군가, 아닌강 밖에 없었다. "날 위해 기도해줄래요?" 내가 편안하게 죽어갈 수 있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줄래요?"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게끔 "계속해서 개가 짖을 수 있게 해줘요."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 순간 기도를 구한 것은 일순간의 도피에 불과하다. 다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을 때, 우주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되찾은 것, 그 대답은 신이 아니었다. 절망은 위안을 구하러 잠시 도망치게 했을지 몰라도 희망은 그녀를 다시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불러왔다. 때문에 난 신을 집어넣고 싶지 않다. 








중력. 중력은 굉장하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우주정거장 톈공이 추락하는 장면은 단연 경이적이다. 아니면 외로움이랄까. 주인공이 셴주를 타고 하강할 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거대한 우주정거장은 거기에 매달린 인간을 개미처럼 보이게 하더니, 지구는 다시 그걸 조약돌로 보이게 한다. 지구가 시야 가득히 펼쳐지고 호숫가에 조약돌같은 정거장이 떨어지는 장면이다. 그렇게 거대하게 보이던 우주정거장마저도 너무나도 연약해보였다. 우주정거장은 추락하면서 대기에 부딪쳐 전신이 요동치고 결국엔 천천히 부서져서 불에 타 조각났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정말 멋지다. 이곳은 영화에서 처음으로 중력을 마주하는 장면이다. 거대한 지구는 대적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하다. 주인공도, 우주선도, 우주정거장도 무력하여 저항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그런 무시무시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딸려가는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게 느껴졌다. 중력은 금방이라도 우주선을 산산조각내고 불에 태워서 간단히 목숨을 빼앗아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를 전율케 한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다. 그녀가 우주에서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그녀가 돌아온 곳은 다시 인간과의 연결이 있는 지구라고. 내 생각은 다르다. 중력은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힘이 아니다. 지구 위에서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에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죽은 딸을 언급했다. 마치 우주의 무중력 상태처럼. 모든 관계가 끊어져 있었다. 그녀는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은 뒤, 살아갈 것을 다짐한 뒤 지구로 돌아왔다. 지상의 우리에겐 너무나도 많은 구속이 존재한다. 그것이 우리를 얽매고 목을 죌 수는 없다. 우리가 중력을 이길 수 없다는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거기에 납작 엎드려 살아야 한다는건 아니다. 지구 위의 중력을 이기지 못해 도망쳤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었지만 그것은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중력에 맞설 용기를 얻었고 그래서 돌아온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도시(사회)를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천사 아니면 짐승 뿐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전자는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후자는 자신이 죽는다는걸 모르기 때문이랬다. 죽음은, 반드시 예정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자각이 우리를 다시 곁으로 불러들인다.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에, 우리는, 지상으로. 인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인간이 사회에 순응할 때, 뒤르켐이 말했듯, 인간은 해방감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해방감은 맹목적이고 무차별적인 물리적 힘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중력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녀는 처음 물리적인 힘을 도피하고자 우주로 나갔던 것이다. 우주에서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패배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해방을 찾고 승리자로서 돌어갔다. 지구로 귀환하기로 하였을 때, 중력은 더 이상 그녀에게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딸의 죽음을, 중력을 버티고 살아갈 자신을 얻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네 발로 기어서, 뭍으로 나와 두 발로 딛고 일어선다. 중력은 완전히 그녀의 발 아래에 있다.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로 인간을 올려다 본다. 사람은 땅을 딛고, 하늘을 이고 두 발로 선다. 그리고 걷는다.


인간이 나약하지만. 나약할지 몰라도.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더 큰 존재에 귀의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경외로운 우주에 비하면 우리는 갈대에 불과하더라도. 그 경외심이 우리를 굴복시키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우린 그것을 떨쳐낼 수 있다.  






훌륭한 영화를 보는 것은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것과도 같다. 사랑하는 연인의 일상처럼. 영화의 지극히 사소한 부분까지도 전부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은 자신의 연인의 일상에 대해서 몇시간이고 떠들어대곤 한다. 마치 그걸 듣는 우리에게도 그것이 중요한 사실이라는 듯이. 또한 매력적인 여인이 누구를 매혹시키기 위해 구차한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듯이 이런 영화에겐 쓸데없이 현학적 장치라든가 수사적 도구가 필요하지 않다. 일단 관객을 잡아다 앉혀두기만 하면 나머지는 관객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다. 관객의 상상력은 영화의 온갖 부분을 연결시키고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며 영화 속 빈 공간을 채울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매우 작은 오브젝트 하나 까지도 너무나 흥미롭게 느껴진다. 기회만 된다면 이 영화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보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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