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瀟湘館/남경(2014-)

남경(南京), 간략한 역사

by Mr. Trollope 2015. 2. 26.


중국의 수도, 북경의 이름이 북경인 이유는 남경 때문이다. 원래 수도는 으뜸인 도시라는 뜻이고 거의 대부분, 수도로 지정된 도시는 그 나라의 중심이다. 하지만 중국의 수도는 북경, 이 이름은 '북쪽(北)'에 있는 '수도(京)'라는 뜻이다. 왜냐면 당시 남경이 중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원래의 수도=남경보다) 북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에서 북경(北京)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상해에서 1시간 거리에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도시는 한국으로 치면 그 위상은 대구 정도에 해당한다. 인구는 천만이 넘지만 막상 직접 보면 서울같은 큰 도시라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다. 이 도시를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북경이 중국의 정치적 수도, 상해가 경제적 수도라면 서안은 역사적 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남경은? 내 생각에 정신적 수도라고 부르는게 맞을 것 같다. 실제 중국인들에게 이 말을 한다면 갸우뚱할 것이다. 그들은 남경이 수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중요한 도시라고 부르는 것조차 가당키나 한 소리겠냐고 할 것이다. 아마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중국의 정신적 수도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중국의 오랜 역사는 무수히 많은 영광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 못지않은 치욕의 역사도 많다. 한국처럼 작은 나라가 아니니까 중국에는 그런 기억이 없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은 한국보다 더 오래 더 긴 외침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그리고 외세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는 시절이 올 때마다, 남경은 중국의 문화적, 정신적 정수를 보호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삼국지의 영웅이 모두 죽고 우리가 아는 인물이 모두 사라져갈 때 쯤이면 중국은 북방 민족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 남쪽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과거에 손권이 수도로 세운 건업이라는 도시에 모였다. 그곳에서 300년을 버티면서 중국은 그들의 문화적 정신적 핏줄을 지켜나갔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북쪽으로부터 유목민족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하지만 결국은 중국문명에 동화되어 사라져갔다고. 마치 바다 위에 떨어진 소금 조각처럼 북방민족은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졌다-그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허풍이다. 원나라가 중국을 점령했을 때,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했을 때 그들이 남긴 영향력을 생각해 본다면, 이 때 중국 전체가 점령당했다면 오늘날 중국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북방민족을 뿌리로 해서 만들어지 나라였고 때문에 그들의 특징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중국인들은 생채기도 나지 않고 중국이 그들을 동화시켰다고 자신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시무시한 군사력을 자랑했던 몽골의 침략 앞에 가쁜 숨을 몰아 쉬던 송나라가 항주에서 마지막 저항을 끝낸 지 백년 뒤, 남경에서 중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북방민족을 물리치고 중국 전역을 되찾았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 처음이다. 3천년 동안, 중국의 모든 제국은 북쪽에서 시작했다.) 그것이 명나라였고, 명나라의 수도는 남경이었다. 명나라는 중국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밝았지만(明) 중국의 모든 나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300년을 넘기지는 못했다. 명나라가 그 운을 다하였을 때, 잠시나마 그것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남경에서. 비록 실패했지만. 그리고 300년 전 그의 조상이 나라를 시작한 곳에서 마지막 수명을 다했다.


청나라는 중국의 운명을 심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오늘날 중국에 남아 있는 '중국적인' 문화는 거의 대부분, 명나라의 것, 아니면 청나라의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의 것이 더 많다. 나는 청나라는 결국 명나라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청나라는 명나라와는 확실하게 구별이 되는 특징을 남겨 놓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청나라의 것(만주족의 것)을 제외한다면, 지금의 중국은 정말 애처로울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은 정말 불쌍할 정도였다. 영국 그리고 프랑스 심지어 일본이, 청나라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중국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 무대는 다시 한번 남경이었다. 북경-은 청나라의 수도였고, '중국'을 회복하기 위한 무대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상해-는 서양침략자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역시 마찬가지로 '중국'을 위한 도시가 될 수는 없었다. 여기 또한 제외되었다. 중국의 20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도시를 선택해야 한다고 느꼈을 때, 무엇이 중국이냐고 물었을 때 중국은 이것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수도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남경이 수도가 되었다. 


시도는 불완전했다. 20세기 초반은 많은 중국인들의 기억 속에 수치와 굴욕의 역사다. 하지만 그 역사가 수치로 기억되지 않았으려면, 중국의 역사 자체가 남지 않는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중국의 수치를 이 도시가 앞장서서 견뎌내지 않았더라면, 그 수치는 중국 전체가 받아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 뒤에 과연 오늘날의 중국이 있었을까? 중국 전역이 1937년의 일(남경대학살)을 겪어야 했다면, 지금의 중국이 있었을까? 그랬기에, 21세기의 중국은 G2, 슈퍼 파워, '슈퍼 차이나'가 되었다. 남경이 아니었다면 이 영광도 없었다.




오늘날 남경을 찾은 사람이라면 꼭 찾아야 하는 곳 - 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곳 - 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명나라를 세운 명태조 주원장의 무덤(과 그 옆 쑨원의 무덤), 다른 하나는 남경대학살 기념관이다. 많은 중국 사람들은 중국의 위대함 만을 기억하고 싶어 한다. 또 중국에 관심을 갖는 많은 외국인들도, 중국의 영광(=웅장함, 화려함, 거대함) 만을 보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마치 그게 중국이 가진 힘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생각은 다르다. 중국의 힘은 수난과 고통을 이겨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남경대학살 박물관이 없었다면 중국도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중국은, 거대한 자금성이 아니라, 남경대학살 기념관에 있다. 만약 중국이 없어도 자금성은 남았겠지만 중국이 없으면 남경대학살 기념관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곳이야말로 현재의 중국을 대변하는 가장 큰 목소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