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4년 3월 19일 북경이 점령되고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약 한달 가량이 지난 뒤 4월 중순 즈음에야 남경에 도착했다. 숭정제의 뒤를 이어 황제를 세워야 마땅한 첫번째 적임자인 황태자는 이자성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남경에 남아 있는 신하들은 다음 황제의 재목을 종실 중에서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남경은 명대의 2번째 수도였기 때문에 비교적 완전한 정부기구가 남아 있었으며, 또한 강남은 이미 천하에서, 아니 당시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청나라에 대항해 제대로 된 왕조를 건설하기에 어려운 점 역시 존재했다. 첫째, 정권의 구성이 복잡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명은 먼저 북경에서 피난을 온 관료, 기존에 남경에 배치되었던 관료, 강남 연해를 중심으로 왜구를 토벌하면서 실력을 기른 군대, 그리고 같은 이유로 재화를 축적한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강남으로 피난을 왔던 기존의 왕조들과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동진이나 남송은 모두 화북에 위치해 있다가 북쪽으로부터의 압력을 받고 강남 지역에서 재차 세력을 확보한 왕조였다. 하지만 이들과 남명이 다른 점은 북쪽에서 내려온 관료들이 통제하기에 강남은 이미 너무 커버렸다는 점이었다. 강남은 문화의 중심지이자 경제의 중심지였으며, 동남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왜구를 토벌하면서 확보한 군사력도 있었다. 강남은 문화적, 경제적 실력을 갖춘 지역이었고 북쪽출신이 내세울 것은 이미 무너져버린 정통성 뿐이었다. 이들은 북쪽에서 내려온 관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계속해서 대립하였다.
둘째, 대항해야 할 적이 많았기 때문에 왕조가 수립될 당시 목표가 분산되었다. 남경을 중심으로 건설된 남명이 대항해야 할 적은 일단 서쪽에 장헌충의 대서 정권이, 서북쪽에 이자성의 대순 정권, 동북쪽에 만주족의 청나라가 있었다. 남명은 일단 숭정제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자성을 첫번째 목표로 정하였고, “오삼계(청나라)와 연합하여 이자성을 궤멸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이자성의 군대가 빠르게 무너져 버렸고 남명은 일차적 목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자성의 세력을 우선적으로 확실하게 소탕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오삼계(청나라)와 연합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과, 북쪽에서 내려온 청나라를 먼저 물리쳐야 하며 이자성은 이미 부차적인 목표가 되었다는 주장으로 나뉘어졌다. 또한 서쪽에 위치한 장헌충 역시 심각한 위협요소로서 간주되었기 때문에 남명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배치해야 했다. 또한 청나라는 처음 중원에 입성하였을 때 내세운 기치가 “숭정제의 원한을 갚는다”였고 오삼계의 한족집단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남명의 입장에서는 초기 방침을 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가 의외로 빠르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홍광정권 1644-1645
남명의 첫번째 황제로 내정된 사람은 복왕 주유숭이었는데, 그는 마사영과 사가법 등의 지지를 받고 황제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마사영과 사가법은 남명을 지켜 줄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는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었다. 1644년 5월,황제에 오른 그는 연호를 홍광으로 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이 때의 남명을 홍광정권이라고 부른다. 이듬해 1645년 3월, 이제 막 탄생한 홍광정권이 아직 준비를 미처 하기도 전에 신속하게 남하한 청나라는 양주를 점령하고 장강을 도하, 진강을 장악했다. 양주와 진강이 점령당했다면 남경에는 이미 방어선이 없어진 셈이었다. 주유숭은 남경을 빠져나와 도망쳤지만 이내 붙잡혔다. 1645년 5월15일 조지룡, 왕봉, 전겸익 등의 대신들을 대표로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홍광정권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융무정권 1645년
1645년 6월 초, 홍광정권이 무너진 직후 복건순무 장긍당, 남안백 정지룡 등을 중심으로 당왕 주율건을 황제로 세우는 정권이 만들어진다. 복주를 수도로 하고 연호를 융무로 하였기 때문에 이를 융무정권이라고 부른다. 양주와 남경이 점령당하면서 청나라가 자행한 잔인한 행동이 강남지역에 청나라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강남을 장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처음 강남에 내려왔을 때까지 만해도 청나라는 (강남의 신사들이 보기에) 오삼계의 뒤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양주와 남경에서 보여준 태도는 그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혀 주었다. 그들은 침략자였다. 융무정권은 반청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의군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홍광정권에서 보여주었던 (대개 복왕 주유숭의 개인적인 결함에서 나온) 잘못된 정책을 철폐함으로써 커다란 반향을 이끌어내었다. 안휘, 강서 등지에서 의병이 잇달아 일어났다. 하지만 융무정권 역시 약점이 존재했는데, 황제 본인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점이었다. 각지에서 의병이 발생하였고 그를 황제로 내세운 정지룡에게도 군대가 있었지만 황제는 이것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마치 당나라 말기 각지에 절도사가 난립한 형국이었다. 청나라는 사방에서 조여 오는 반청복명의 의병을 상대하기보다는 똑바로 남명의 심정을 겨누었다. 1645년 8월 수도가 함락되고 융무정권은 결국 멸망한다.
영력 정권 1646-1661
- 반격
1646년 11월, 융무정권이 무너지고 약 1년 뒤, 양광총독 정괴초, 광서순무 구식사 등을 중심으로 계왕 주유랑을 황제로 옹립하고 이듬해의 연호를 영력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이를 영력 정권이라고 부른다. 당시 청나라는 신속하게 남하하면서 명나라를 부흥시키려는 2번의 시도를 재빠르게 좌절시킴으로써 커다란 우환을 잠재우는데 성공하였지만, 대신에 등 뒤에 해결하지 못하고 남겨둔 문제점이 속출했다. 그들은 이자성과 장헌충의 세력을 소탕하고 하북을 완전하게 장악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강남에서 체발령을 거부하는 지역에 대해 저지른 잔인한 보복은 각지에서 반청 의병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대순 정권은 이자성이 사망한 이후 잔여 병력은 마치 오버마인드가 죽은 뒤의 저그 무리같이 하북 지역 이곳 저곳에서 날뛰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두갈래로 나뉘어져 버렸다가 (농민군으로서 체제를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자성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한족 대 만주족의 대립 구도를 받아들였다. 학요기, 유체순이 이끄는 무리와 이과, 고일공이 이끄는 두개의 집단은 하북 지역을 떠나 호남으로 남하, 호광총독 하등교, 호북순무 도윤석에 합류하였다. 이로써 명나라의 멸망 이후 혼돈으로 난립하였던 정국은 한족 대 만주족의 대결구도로서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1647년, 학요기의 부대가 전주에서 청나라의 군대를 대파하고 호남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이듬해 그 뒤를 이어 호광총독 하등교가 이끄는 부대가 호남으로 진격하였고,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호남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세가 크게 움직여 청나라가 임명한 강서제독 김성환, 광동제독 이성동, 광서순무 경헌충, 대동총병 강양, 연안영참장 왕영, 감주부장 미라인이 청나라를 버리고 남명에 귀의하였고 이로써 청나라는 후방이 남명의 위협에 노출되게 되었다. 이 때 영력 정권이 장악한 지역은 최대치에 달해 운남,귀주, 광동, 광서, 호남, 강서, 사천 지역으로써, 대략 중원의 절반을 회복하였다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영력 정권은 남명의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1646-1661)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종국
하지만 영력 정권 역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우선 영력 정권의 군사력의 주력은 이자성과 장헌충의 잔당으로서 명나라의 유신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대역죄인’이었다. 둘째 영력 정권의 내부는 대순 정권 출신, 대서 정권 출신, 명나라의 유신 출신, 정지룡을 대표로 하는 동남 연해 실력자들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중앙의 황제가 이를 지휘할 수가 없었다. 비유하자면 황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몇 개의 파도가 합쳐져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나뭇잎을 높게 들어 올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일단 눈앞의 강대한 적이 들이닥쳐 있을 때는 단합하여 대항하게 되지만, 잠시 위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논공행상의 시기가 이르게 되면 반드시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자명했다. 때문에 한 때 크게 위협에 몰린 청나라는 한숨을 돌리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모을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애초에 남명 정권의 군사력은 명나라의 유신들로 이루어진 관군도 존재했다고는 하지만 훈련받지 않은, 농민군 역시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번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고 목적성이 약해지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1650년경이 되면 하등교, 구식사, 장동창 등 남명의 중요 지휘관들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청나라는 다시금 호광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금 영력 정권의 중심부를 압박하게 되었으며, 그 외에도 남명이 수복한 지역을 재차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자성의 잔당으로서 남명에 합류한 이과 등은 남명의 통제에서 이탈, 형양 등지를 떠도는 방랑군이 된다. 이들은 1664년이 되어서야 진압되었다.
1652년, 수세에 처한 남명은 장헌충의 잔당인 손가망, 이정국 등을 받아들여 다시금 세력을 확충하였다. 군대를 확보한 남명은 곧바로 전면적인 반격에 나섰고, 호광, 사천지역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끝내 대세를 회복하는 것까지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1653-1657년 사이에 걸쳐 천천히 힘을 상실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1658년, 청나라가 주력 군대를 이용해 공세로 나섰다. 호광, 사천 전역을 상실하였고 오삼계가 이끄는 군대가 남명의 수도를 압박하였다. 1659년 운남이 점령되었고 황제가 국경을 넘어 미얀마로 도망침으로써 영력정권은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고 사실상 소탕되었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1661년 오삼계가 미얀마로 쳐들어갔고 영력제는 포로로서 넘겨졌다.
결말
남명의 멸망은 1661년의 일이지만 실제로는 융무정권이 멸망하였을 때 이미 남명이 멸망하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청나라는 융무정권까지는 빠르게 목표로 하였지만 영력정권에 대해서는 그렇게 공세로 나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영력정권에 이르러 전후방에 걸쳐 청나라를 압박하기는 하였지만 청나라의 목표는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북경-남경)를 완전하게 장악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력정권은 비록 한때 중원 절반을 회복하는 수준으로까지 청나라에 대항하였지만 본래 구성이 잡다하였기 때문에 단결하기 어려웠고 중원의 심장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미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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