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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명청시대 중국여성의 여행활동

by Mr. Trollope 2011. 6. 10.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누구나 여행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교통이 불편하던 고대에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평소에는 겪을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직접 유명한 명승지를 찾아본다는 것은, 현재보다도 훨신 어렵고 사치스러운 활동이었다. 명대 말기는 여행이 대단히 큰 유행을 얻었던 시기였다. 당시에는 수많은 여행 관련된 서적이 출판되어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은 여행 안내서 류의 책이었다. 역사학자 周振鶴의 통계에 따르면, 명전기와 중기에 나타난 여행기의 수량은 다소 적지만 嘉靖(1522-1566)연간 이후로 점차 늘기 시작하여 萬曆(1573-1620) 이후에는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문인 사대부가 지은 여행기 이외에도, 보다 대중적인 여행안내서가 등장하여, 만력 37년(1609)에 출간된 《新鐫海內奇觀》이 그 예인데, 이 책 안에는 전국 각지의 명승지를 그린 130폭의 그림을 삽화로 실려 있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외에도 명말에는 각지의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수많은 종류의 여행 안내서가 출간되었다.



이른바 “路程書”는 오늘날의 교통지도집과 같은 것으로, 이 책의 독자들은 주로 각지를 여행하는 상인들이었다. 명대에는 비록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수륙 교통망이 형성되어 있기는 했지만, 완전한 교통정보를 갖춘 안내서가 없었으며, 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불편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종종 사업을 의논하고, 물건을 사들이고 상품을 운반하는 등의 일을 처리하러 남쪽지방에서 북쪽지방으로 올라온 상인들의 경우, 여행 도중 시간을 지체하기라도 한다면 불필요한 어려움에 처할 위험이 있었다. 도로 안내서 중에서 비교적 유명했던 것이, 명말 휘주상인 黃汴이 편집 출간한 《天下水陸路程》이 있다. 황변은 본인이 상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각지의 수륙 교통로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 교통 안내서를 작성하여, 각지방 도로에 어떠한 교통시설이 있는지, 각지의 수륙 역참이 무엇이 있는지를 비롯해 이외에도 각지의 숙박업소의 상태, 지역 특산물, 사회의 치안상태, 지역의 풍속, 각지의 명승 고적지, 배·가마의 운임등을 모두 기록하였다. 황변이 편찬한 도로지도는 사대부들과 상인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재판을 찍어낼 정도로 인기가 있어, 많은 지역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명말에는 또 다른 대중적인 출판물 종류가 있었는데, “日用全書”라는 것으로, 각지의 풍경과 명승 유적지에 대해 소개한 책이다. 이러한 종류의 책은 오늘날의 백과전서와 비슷하여, 책 속의 내용에는 제한없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며 대부분은 삽화를 곁들였다. 王圻, 王思義 부자가 출판한 《三才圖會》(1607)가 있는데 모두 106권이다. 이른바 “三才”라는 것은 ‘하늘, 땅,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이 天文, 地理를 비롯하여 사회와 인간생활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의 106권은 다시 14장으로 나뉘는데, 그 순서는 天文, 地理, 人物, 時令(계절), 宮室、器用、身體、文史、人事、儀器、珍寶、衣服、鳥獸、草木 순이다. 여기에서 “地理” 속에는 각지의 지역 상황 및 이름난 산과 강에 대한 소개가 들어 있어 역시 삽화를 곁들였다. 때문에 이러한 류의 책은 모두 여행용 핸드북의 기능을 하였다. 남성들이 여행을 즐기는 풍속은 점차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명말부터 시작하여, 여성들 역시 각지로의 여행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서로 계급이 다른 여성의 경우에, 그 여행의 목적과 방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활동은 여성의 사회 활동의 범위를 크게 확장시켰으며, 또한 전통사회 속 여성에게 가해진 엄격한 제한도 점차 변화시키게 되었다.

 

進香

일반적인 평민 가정의 여성의 경우라면, 외출하여 각지를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進香 여행단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른바 “進香”이라는 것은 큰 절에 참배하러 떠나느 것으로 일반적으로 장거리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朝聖”(성지순례)의 의미도 있었다. 특수한 날짜가 되면, 사람들은 집단으로 큰 절로의 봉향을 떠나는 “進香團”이라고 하는 여행단을 조직하였다. 봉향하러 가고 오는 여정은 제법 길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수일에서 수십일의 시간을 필요로 했고, 길에서 음식, 숙박, 교통수단을 해결해야 했고 참배를 하는 절에 시주하는 비용 역시 비교적 컸지만, 큰 절에 참배를 하면 가정에 복이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비교적 정당한 지출에 속했다. 하지만 불교 사찰이건 도교 사원이건 모두 유명한 산 위에 자리잡고 있어, 봉향을 하러 떠나는 때에는 이러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때문에 봉향은 외출의 기회가 무척 적었던 여성의 입장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활동이었다.

명청시기에, 중국의 북쪽지방에 가장 유명한 도교 사원이 위치한 봉향의 명승지는 泰山이 있었다. 태산은 중국의 5대 명산 중의 하나로 산동성에 위치하며, 그 위치 때문에 “東嶽”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외의 나머지 유명한 4대 명산은 北嶽인 恒山(산서성)、西嶽인 華山(섬서성)、中嶽인 嵩山(하남성)、南嶽인 衡山(호남성)이 있다.이 5대 명산을 합칭하여 “五嶽”이라고 부르며 봉건시대 제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 5악 중에서 태산의 지위가 가장 높았는데, 왜냐하면 중국 역대 왕조 중 첫 번째 황제인 진시황이 이 태산에서 대규모의 봉선의 의식을 치렀기 때문이다. 역대 문인드 ㄹ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태산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유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맹자는 일찍이 “孔子登東山而小魯,登泰山而小天下(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국이 작다 하고, 태산에 오른 뒤에 천하가 작다 하였다.)”(《孟子·盡心上》)이라고 말했는데, 그 의미는 “공자가 노나라의 동산을 알라가고 전체 노나라의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고 말했고, 공자가 태산에 오른 뒤에 천하의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고 말했다.”이 말이 말하는 것은 사람은 계속해서 학업을 쌓아야 하며, 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자신의 시야가 날이 갈수록 넓어진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登泰山而小天下”이라는 표현에서 태산이 사람들의 눈에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史記》의 작가 司馬遷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人固有一死,或重於泰山,或輕於鴻毛”이 말이 의미하는 것으로부터 태산이 가장 고귀하고 위명이 높은 것의 대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詠絮之才”라는 말을 낳은 동진의 여성 시인 사도온 역시 《泰山吟》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峨峨東嶽高,秀極沖青天(아아 태산의 고귀함이여, 그 수려함이 하늘을 가리는구나.)”



명청시기 태산은 가장 중요한 명승지였다. 그건 이곳이 단지 ‘嶽高’이라는 신분 때문만은 아닌, 유명한 도교 사원인 碧霞元君祠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碧霞元君祠에서 모시는 “碧霞元君”이란 민간에서 “泰山娘娘”, “泰山老奶奶”,“泰山老母”라고 부르는 존재로, 그녀는 도교 관념 속에서 정식으로는 “天仙玉女碧霞元君”이라고 불리운다. 碧霞元君은 도교의 중요한 여신 중의 한명으로 그녀는 “庇佑眾生(중생을 보호하는 것)”이었으며, 중국 북쪽 지역에서 민간의 백성들은 碧霞元君에 대한 신앙이 깊어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날이 갈수록 신통광명해져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농사꾼은 풍년이 들게 하고, 장사꾼은 재물을 얻게 하며, 여행길을 평안하게 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해주고, 병든이와 아픈이를 낫게 해주고, 여성이 아이를 갖게 해주고, 자식이 건강하게 해준다고 한다. 때문에 특히 여성들이 碧霞元君에 대한 신앙이 깊어 중국의 북쪽 지방에서는 수많은 지역에서 이른바 “娘娘廟”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泰山娘娘을 섬기는 사당묘로 즉 碧霞元君을 섬기는 곳이다. 이러한 신앙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碧霞元君이 중국의 민간 신앙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여신 중의 한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수많은 娘娘廟 중에서, 태산에 위치한 碧霞元君祠가 당연히 가장 규모가 컸으며, 때문에 명말부터 각지에서 泰山娘娘을 믿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직접 태산을 올라보고 싶어했으며, 이곳의 사당에 와서 祈禱, 許願, 進香(기도하고, 소원을 빌고, 향을 태우는 일)을 하고자 했다. 碧霞元君의 탄신일은 음력 3월 15일이며, 이 날의 축제는 규모가 대단히 컸다. 태산에의 봉향에 관련한 내용을 기록한 명대의 사료와 소설은 매우 많다. 역사학자들은 자주 소설을 예로 드는데, 그 중에서 17세기 작자미상의 소설 《醒世姻緣傳》이 가장 유명하다.

《醒世姻緣傳》은 명대 전기 (정통연간에서 성화 연간)를 배경으로 하며, 생명의 윤회, 부부의 관계, 권선징악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의 전편은 모두 100회이며, 전반부 22회의 남자주인공은 晁源이며, 관료 집안의 자제로 대단히 포악한 성격의 남성이었다. 晁源의 부인은 계씨였는데, 둘 사이의 애정은 나쁘지 않았으나, 나중에 조원은 珍哥라는 이름의 한 기녀에 흠뻑 빠지게 된다. 어느 겨울날에 조원은 진가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한 여우를 쏴 죽이게 되었는데, 그는 몰랐지만 이 여우는 泰山聖母가 기르는 여우 중의 하나였다. 이것이 조원이 저지른 첫 번째 잘못이었다. 나중에 조원은 진가를 첩으로 들이는데, 두 사람은 정실 부인은 계씨를 학대하여, 계씨를 핍박하여 스스로 목을 매달게끔 하였다. 이것이 두 남녀의 전생에 있었던 일이다. 23회 이후는 내세에서의 일을 담고 있다. 조원은 후세에 유약한 남성으로 태어나 이름이 狄希陳이라고 했다. 전생에 그가 쏴 죽인 여우는 악독한 여인으로 환생하여 이름이 薛素姐였는데, 나중에 그녀는 적희진의 부인이 되었다. 전생에 적희진의 부인이었던 계씨는 적희진의 첩인 童寄姐가 되었다. 전생에 적희진의 첩이었던 진가는 珍珠라는 이름으로, 동기조의 시종이 되었다. 이 생에서, 이들 인물들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리게 된 것이다. 남자 주인공 적희진의 처와 첩 중 한명은 전생에 그가 쏴죽인 신선의 여우였고, 한명은 전생에 그에 의해 학대당한 정실 부인이었는데, 지금은 두 사람이 모두 악독한 여인으로 환생하여 두 사람은 모두 어떻게 하면 남편을 괴롭힐까 궁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전생에 마음이 맞았던 첩은 여자 주인의 미움을 받는 시종으로 태어나 나중에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게 된다.

《醒世姻緣傳》과 “三言”,“二拍”은 비슷한 내용으로, 모두 그다지 심각한 주제를 담고 있지 않으며 단지 권선징악, 인과에 따른 윤회의 업보 등등의 미신적인 주제가 전부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들은 당시 사회의 풍경을 대단히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특히 사회의 하층 민중의 생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 자료로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 《醒世姻緣傳》 속에서는 당시 여성이 태산에 봉향하러 가는 일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매우 생동감이 있다.

소설의 68회에 보면, 적희진과 薛素姐가 생활하던 곳이 산동성의 明水鎮이었는데, 이곳에는 2명의 무당이 있었는데 한명은 성이 侯, 다른 한명은 성이 張이었다. 이 무당들은 “三姑六婆”의 한 종류로, 이 소설 속에서 역시 바르지 못한 종류의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주변의 여성들을 속여 사당을 짓는데 돈을 내도록 한다거나 불상을 짓는데 시주하도록 속여서 먹고 살았다. 돈을 내면 내세에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고, 돈을 내지 않으면 다음 생애에 고통을 당한다. 나쁜 기운을 받은 여성이 돈을 내면 그 기운을 물리치게 된다. 정실의 핍박을 받은 첩이 돈을 내면 집안 내의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이런 식의 속임수로 부녀자들을 등쳐먹는 것이 이 두 노인이 먹고 사는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여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후씨와 장씨는 각종 종교활동을 조직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泰山娘娘廟에 봉향하러 가는 일이었다. 설소저의 집안이 비교적 부유했기 때문에, 이 두 노인은 설소저를 알게 된 다음부터 계속 이걸 노렸는데, 설소저의 부모와 그녀의 남편 집안이 모두 점잖은 집안이라 줄곧 기회가 없었다. 나중에 설소저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 이 두 노파는 장례식에 참석하여 결국 설소저와 안면을 트는데 성공한다. 설소저는 그 달 15일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태산에 봉향을 드리러 간다는 말을 듣고, 몹시 흥미가 동해서 함께 따라가고자 했다. 소설 속에는 여기에 관해 자세한 상황 묘사가 나온다. 그녀는 먼저 明水鎮에서 태산에 이르기까지의 길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봤다. 두 노파는 태산까지의 거리가 290리인데, 가는 길에 유명한 사당, 절이 많이 있고, 가는 길의 풍경이 대단히 아름다워 길 위에서 봉향하러 나오는 수많은 사람·말·가마를 볼 수 있고 대단히 재미가 있기 때문에 다시는 구경 못할 좋은 기회라고 꼬드겼다. 설소저는 다시 묻기를, 산위에 풍경이 좋은 곳이 있는가를 물었다. 노파가 대답하길, 천하에는 절대 이 태산만한 산이 없는데 당연히 경치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고, 산위에 오르면 신선이 사는 곳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要沒有好處,爲甚麼那雲南、貴州、川湖、兩廣的男人婦女都從幾千幾萬裏來燒香做甚麼?(만약 태산에 절경이 없다면, 왜 운남, 귀주, 사천, 호남, 광주에서 남녀노소 구천리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태산에 봉향하려 하겠습니까?)”산 위의 경치는 말로 다할 수 없어, 朝陽洞、三天門、黃花嶼、舍身台、曬經石、無字碑、秦松漢柏、金簡玉書 등은 태산이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걸 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두 노파는 다시 설소저에게 말하길, 봉향하러 가는 길 또한 이에 못지 않게 재미가 있어, 가마에 앉아 있기만 할 수도 없이 어디든지 평소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모두들 말을 타거나 나귀를 타고 가는데, 집안에 말이 있으면 자기가 직접 말을 타고, 만약에 없으면 말을 빌려서 탈 수도 있고, 봉향하러 말을 빌리는데 8천전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 외에 길 위에서 즐길 수 있는데 한 사람당 12냥 정도면 너끈하다고 했다. 설소저는 이 말을 듣고는 태산에 봉향하러 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는 번듯한 대가족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혼자서 멀리 외출할 수는 없고 반드시 남편을 데리고 동행해야 했다. 설소저가 남편에게 함께 가자고 요구를 했을 때, 남편은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설소저가 한바탕 난리법썩을 피운 뒤에는 결국 같이 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소저가 탄 나귀를 직접 끌고 가게 되었다. 책 속에는 부인들 무리가 명수진에서부터 태산으로 출발할 때의 왁자지껄한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一群婆娘,把那驢子亂攛亂跑。有時你前我後,有時你後我前。有的在驢子上抱著孩子;有的在驢子上墩掉發髻;有的偏了鞍子墜下驢來;有的跑了頭口喬聲怪氣的叫喚;有的要叫兒吃乳,叫掌鞭來牽著韁繩;有的說麻木了腿骨,叫人從鐙裏與他取出腳去;有的掉了丁香,叫人沿地找尋;有的忘了梳匣,叫人回家去取。

(여자들 무리는 나귀를 타고 어수선하게 길을 떠났다. 어떤때는 앞서서 가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뒤로 쳐지기도 하였다. 나귀 위에 아이를 안고 탄 사람도 있고, 나귀 위에다가 작은 탁자를 놓고 머리를 빗는 사람도 있었다. 안장이 쏠려 나귀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람도 있었고, 나귀가 움직일때마다 꽥꽥 이상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누구는 자기 아이가 모유를 먹어야 한다고 마부를 불러 말고삐를 대신 잡아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누구는 허벅지가 땡겨 아프니까 사람을 불러 등자 위에서 발을 빼게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누구는 봉향드릴 향을 떨어뜨리고, 가는 길 내내 뒤적뒤적 찾는 사람도 있고 누구는 화장갑을 잊어버리고 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봉향하러 가는 길 도중에는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전문적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이 있었다. 그들은 도씨와 후씨를 보자 기뻐서 달려와 맞이했다. 여관에서 쉴 때 도씨와 후씨는 사람들 앞에 泰山娘娘의 탱화를 늘어놓고 부인들은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두 노파가 경문을 읊는 것을 들었다. 여관 주인이 맑은 물을 떠와 세수를 하고, 그 다음에는 점심과 차를 내왔다. 휴식을 취한 이후에는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함께 봉향하러 떠난 무리의 여성들은 모두 평민 가정 출신의 여성들이어서 먹는 음식은 모두 값싼 것이었고, 요리도 모두 간단한 것들 뿐이었고, 대개 빵과 두부탕, 밥 정도 였다. 설소저는 평소에 절대 이런 걸 먹지 않았지만 두 노파를 따라 이 여행에 참가한 것이 매우 재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절대 이걸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행을 떠난지 셋째날이 되자, 일행은 泰安州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 태산이 있었다. 머무를 객점을 잡고, 모두는 씻고 차를 마신 다음에 일단 먼저 주변의 경치 좋은 곳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돌아와서 식사를 하고 잠을 잔 다음, 밤 12시가 되었을 때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은 다음, 산에 올라갈 준비를 했다. 부인들이 이렇게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은 당연히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두 노파가 부인들에게 가마를 타고 산에 올라가도록 권해 그걸 타고 산에 올랐다. 산에 올랐을 때는 아직 밤이었지만, 올라가는 길 좌우에는 모두 등불이 켜져 있었고 환하게 길을 밝혀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이때 설소저는 매우 고생을 하게 된다. 원래 그녀는 교양있는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시집간 남편의 집안도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고 안정된 생활에 익숙해진 터였다. 이처럼 밤중에 일어나 보기는 처음이었고,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익지도 않은 생쌀같은 밥을 씹고, 잘 씻기지도 않은 나물을 먹었으며, 이제 가마를 타고 산을 오르려니 정신이 혼미하고 눈이 침침해져 어지러움을 느끼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부인들은 설소저가 이러는 것을 보고 그녀가 泰山奶奶에게 불경을 저지르고 있다고 수군거렸다. 한 부인은 처음 출발하던 날 설소저가 남편을 시켜 말고삐를 잡도록 한 것을 생각해내고는, 그일 때문에 泰山奶奶이 화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부인들이 그 말을 듣고 이 여자는 泰山奶奶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설소저는 화가 나서 가마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나서 직접 산을 걸어 올라갔다.

여성의 등산용 가마

설소저는 전생에 泰山奶奶이 기르던 여우였기 때문에 이제 태산에 오게 되니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것이어서, 산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마치 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은 다리가 아파서 후들거렸지만 부인이 걸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감히 가마를 타지 못했다. 정상에 도착한 다음에 모두들 碧霞元君祠에 참배를 드렸다. 사당에는 聖母殿이 있는데 전내에는 수많은 향객들이 시주하고 간 금은으로 된 수많은 제기가 있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에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설소저는 남편의 어깨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서 聖母殿의 안쪽을 보고 오라고 시켰다. 향을 피우고 난 뒤에 사람들은 태산의 정상 주변의 풍경 좋은 곳을 둘러보고 다시 가마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설소저는 다시 가마를 타자마자 멀미를 느끼고 다시 남편과 함께 걸어서 내려왔다. 한두시간을 걸어서 내려오니 길 중간에 객점의 점원이 나와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점심과 술안주를 가져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러한 과정을 “接頂”이라고 불렀는데, 태산의 정상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식사를 마친 이후 다시 천천히 하산하였고 객점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저녁에 객점에서는 사람들을 위해 3편의 희극 무대를 보여주었다.

 

《醒世姻緣傳》 속에서는 태산으로 봉향을 드리고 오는 과정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묘사를 했다. 동시대 문인들의 필기 문학 속에서도 역시 이와 비슷한 묘사가 나오는데, 객점에 머무르고 객점에서의 接頂, 演戲 등의 내용은 소설 속의 묘사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예를 들어 張岱(1597-1679)의 《陶庵夢憶》 4권 《泰安州客店》 속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客店至泰安州,不複敢以客店目之。餘進香泰山,未至店里許,見驢馬槽房二三十間;再近,有戲子寓二十餘處;再近,則密戶曲房,皆妓女妖冶其中。餘謂是一州之事,不知其爲一店之事也。…… 店房三等:下客夜素早亦素,午在山上用素酒果核勞之,謂之“接頂”。夜至店,設席賀,謂燒香後求官得官,求子得子,求利得利,故曰賀也。……計其店中,演戲者二十餘處,彈唱者不勝計。庖廚炊灶亦二十餘所,奔走服役者一二百人。下山後,葷酒狎妓惟所欲,此皆一日事也。若上山落山,客日日至,而新舊客房不相襲,葷素庖廚不相混,迎送廝役不相兼,是則不可測識之矣。泰安一州與此店比者五六所,又更奇。

(다른 일반 객점은 태안주에 있는 객점과 비교해서 객점이라고 말할 수준이 못된다. 내가 태산으로 봉향을 드리러 갔을 때, 도중에 수많은 객점을 봤는데, 여기서 처음에는 말이랑 나귀가 있는 마굿간을 2-30간을 보았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까 도박장 20여 곳이 나왔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그곳에는 모두 기원들 뿐이었다. 나는 태안주의 모든 마굿간·도박장·기원이 여기에 있다고만 생각을 했지 그것이 모두 이 객점 한곳의 것인지는 몰랐다. …… 객실에는 3등급이 있어서 만약 가장 싼 방을 고르면 그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에는 채소 요리밖에 없다. 낮에 산에 올라 점심을 먹는데 역시 술과 채소밖에 없으면서 그걸 “接頂”이라고 부른다. 저녁에 객점으로 돌아오면 술상을 차려오면서 축하연을 벌인다. 봉향을 드린 이후에는 그들이 빈 소원이 승진이건, 재물을 얻는 것이건 모두 소원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걸 축하한다고 하는 것이다. ……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객점 내에서 연극을 올리는 무대가 모두 20여 곳이 있고, 연극 배우의 수도 헤아릴 수도 없고 음식을 만드는 주방의 수도 스무곳이 넘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점원의 수도 100-200명은 되는 것 같다. 향을 피우고 돌아온 손님들이 밥을 먹고 싶다거나, 술을 마시고 싶다거나, 기녀를 부르고 싶다거나,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 수많은 손님들이 들락날락 하기 때문에 누구는 이제 막 객점에 도착했고 누구는 산에서 돌아왔고 그러는데, 이 객점에서는 결코 실수를 하는 법이 없어서, 대체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인지 나는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이처럼 규모가 큰 객점이 태안주에만 모두 대여섯 곳이 있어서,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進香에 대한 사대부 계층의 태도

상층사회 사대부 계층의 사람들이 張岱처럼 이렇게 進香을 드리러 가는 모습은 많지 않았다. 사대부들은 유학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비록 그들 역시 인과율·윤회란 생각을 믿기는 했지만 결코 이렇게 다른 대중들과 함께 어울려서 進香團에 참가하거나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처럼 미신을 믿는 행동에 대해서 매우 경멸하였다. 《醒世姻緣傳》속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薛素姐가 가마 위에서 구토를 하게 되자,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泰山奶奶의 심기를 거슬렸다고 말했는데, 進香을 드리러 떠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이런 심리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절강성에 위치한, 進香으로 유명한 명승지 중의 하나로 普陀山이 있는데 동해안의 舟山群島 중의 한 섬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진향을 드리러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다. 배를 타게 되면 남녀가 함께 배를 타다가 풍랑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선내가 불안정해져서 제대로 앉아있기 힘든 상황이 되는데, 이 때 배가 흔들려서 누군가가 넘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보살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만약 두 사람이 한데 쓰러지게 되면 보살이 밀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민간 남녀들이 미신을 믿는 행동은 사대부의 눈에 보기엔 무지의 표현으로 비추어졌고, 때문에 사람들은 이렇게 진향을 드리러 가는 남녀를 두고 자주 “愚夫愚婦”라며 무시했다.

《醒世姻緣傳》 속에서 사람들의 이런 미신에 대산 묘사가 등장한다. 후씨와 장씨가 사람들을 이끌고 태산의 碧霞元君에게 참배를 드리게 되었을 때, 참배를 마치고 난 이후에 泰安州 부근의 蒿裏山으로 놀러갔다. 蒿裏山은 비록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산 위에는 큰 사찰이 있었다. 이 사찰에는 점토로 빚은 10개의 閻王을 모신 大殿이 있었는데 18층의 지옥에서의 고통을 묘사하였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으로 변한 뒤에 그 혼이 蒿裏山으로 가게 된다고 믿었다. 태산으로 진향을 드리러 온 사람들은 누구나 다 蒿裏山으로 가서 사망한 자신의 부모 친척들을 위해 紙錢을 태우고 봉향을 드리길 원했다. 자손들이 자기 선친들의 사후에 고통을 받는지 아닌지 그 모습을 보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사찰의 중이나 도사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사찰 안에 제비통을 놓고 죽간 위에다가 “某司某閻王位下”라고 적고, 이곳에 지전을 태우러 오는 사람들이 돈을 낸 다음에 이곳에서 제비를 뽑아 죽은 자신의 부모가 어느 염라대왕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좋은 결과가 나오면 자손들은 대단히 기뻐했고, 만약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오면 그들은 부모가 정말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고리산에는 매일 같이 곡소리가 들렸다.

설소저 일행이 고리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도 자신의 조상들을 위해 지전을 태우고 제비를 뽑았다. 당시 적희진은 사망한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5번째 염라대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는 그 결과가 좋지 못한 것임을 알고 있었고, 마음속으로 대단히 좋지 못한 상태로 염라대왕전으로 가서 무시무시한 모습을 한 형상을 보게 되었다. 한 여인이 기둥 위에 묶여 있고 도깨비 한 마리가 쇠집게를 갖고 여인의 혓바닥을 길게 빼고 칼로 자르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적희진이 이걸 보자 마치 자기 어머니가 도깨비에게 묶여서 혓바닥이 잘리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흙인형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며 도깨비가 쥐고 있는 쇠집게를 부러뜨려 버렸다. 사람들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는데, 적희진의 모친은 생전에 매우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왜 이런 고통을 받을까? 하고 생각했다. 설소저는 이걸 보고 말하길, 자신의 시어머니가 생전에 잔소리가 심하다고 말하면서, 그녀가 자신을 보고 좋은 며느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남편을 괴롭힌다고 하더니 그래서 이런 보답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소저는 남편이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편을 욕하면서, 당신이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본다고 해서 설마 염왕이 시어머니의 혀를 자르지 못할까 그러느냐? 라고 말했다. 적희진은 감히 다시 울지 못하고 설소저와 다른 사람들을 따라 산을 내려가 집으로 돌아갔다. 고리산에서 집인 명수현에 돌아갈 때까지 종일 7일이 걸려서야 겨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사대부계층이 보기에, 진향단의 또 다른 문제점은 남녀가 한데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醒世姻緣傳》속에 나오는 설소저가 참가한 진향단은 비록 그 참가자가 모두 부녀자들이기는 했지만, 태산에 봉향을 드리고 난 이후에 돌아올 때는 남성 향객들과 함께 객점에 묵기도 하고, 함께 밥을 먹기도 하거나 같이 놀기도 하여, 유명한 산에 올라 참배를 드리는 경우 남녀가 한데 뒤섞이는 일은 유가에서 보기에 “避男女之嫌”라는 가치와 크게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많은 유학자들이 여성들로 하여금 진향단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소설 《醒世姻緣傳》 속에서 설소저의 동생 薛如卞 역시 누나가 노파들과 함께 진향단에 참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처음에 薛如卞은 누나와 매형 둘이서만 태산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그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누나보고 그 나이 또래의 여성들과 함께 가라고 말했다. 산에 오를 때에는 가마를 타야만 하는데, 산에 올라갈 때나 산에서 내려올 때, 안전을 위해서 가마를 타면 가마를 메는 남성들과 얼굴을 맞대야 하고, 가마를 메는 남성 어깨에 발을 올려야 했다. 이 때 가마를 메는 사람들은 고의로 가마를 휘청휘청 거리게 해서 부인들의 치마 사이를 들여다보려고 하기도 했다. 이게 어디 글을 배운 사대부가의 여성이 할 짓이 아니었다. 나중에 薛如卞은 다시 태산으로 봉향을 드리러 떠나는 진향단이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누나와 매형에게 그냥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였다.

 

“姐姐,你去不的。這有好人家的婦女也合人隨社燒香的麼?狄姐夫他已是出了學,上了監生,不顧人笑話罷了,俺弟兄們正火碰碰也還要去學裏去見人哩!這在家門子上沿街跑著燒信香,往泰安州路上搖旗打鼓,出頭露面的,人說這狄友蘇的婆子,倒也罷了;只怕說這是薛如卞合薛如兼的姐姐,他爹做了場老教官,兩個兄弟掭著面,戴著頂頭巾,積泊的個姐姐這們等!”

(누나, 가면 안돼. 어디 제대로 된 집안의 여자들이 그런데 따라서 봉향을 드리러 간다는 거야? 매형이 이미 생원이 되어 國子監의 감생이 되었는데, 형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걸 못하는건 생각지도 않고, 형부더러 그런데 학교도 못가고 다른 사람들이랑 지내도록 한다는 거야? 누나가 그런데 봉향을 드리러 가는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될텐데 그 사람들이, 저 여자가 적씨의 부인이다 라고 말한다면 형 체면은 떨어질 것이고. 또 내가 누나의 누난데 저 사람이 선생이면서도 저 누나는 저런데 간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린다면 내 체면은 뭐가 되는 거냐고!)

 

하지만 설소저는 동생의 충고를 전혀 듣지 않고 크게 화를 냈다. 적희진은 설소저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이 마치 호랑이와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설소저는 동생에게 한바탕 욕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해서 노파를 따라 여행을 떠났다. 물론 설소저는 부정적인 인물의 전형적인 유형으로, 현실 생활 속에서 사대부 가정 출신의 여성이라면 이런 진향단에 참가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고 설령 진향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노파나 다른 평민 부녀자들과 함께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양호한 교육을 받은 일반적인 여성들은 정통적인 유교 관념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민간 대중들의 미신 행위에 대해 동조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바깥으로 나가 여행을 떠나는 경우, 자신들의 행위를 일반 “愚夫愚婦”의 행위와 구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상층사회의 여성의 경우, 그들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부친 또는 남편이 외지에서 관직을 지내게 되는 경우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떠난 경우였다.

 

상층사회 여성의 여행

명청시기에 상층사회의 여성이라면 모두 단기건 장기건 여행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북경의 여성 시사 조직인 “秋紅吟社”과 여기에는 많은 절강성 출신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 여성은 모두 남편이나 부친이 북경에 와서 관직을 지내는 경우 따라와서 장기간의 여행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였다. 여행길 위에서 유명한 명승지를 지나게 되는 경우, 그들 역시 그곳을 유람했다. 많은 여성들의 시가와 문학 작품 속에서 그녀의 여행 경험담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청대의 王貞儀(1768-1797)는 《岱嶽遊記》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부모나 다른 가족들과 함께 태산에 올랐던 일을 적었다. 당시에 왕정의의 아버지가 북쪽 지방에 관리로 부임을 하게 되어, 가족들 전원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들이 태안주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모두들 태산에 올라가고 싶어했다. 전날 6개의 가마꾼을 고용하고, 1일치의 식량을 준비했다. 둘째날 새벽에 가족 전원이 등산을 떠났다. 왕정의의 기록에 따르면 산을 오를 때의 모습이 다음과 같았다.

 

“視途中人則蚤蟻接以行,大都爲香客。香客進香以旅岱者,實皆鄉民庸人無知者流也,而僭妄甚矣。”

(길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개미떼와 같았는데 그들이 모두 진향을 드리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태산에 올라 봉향을 드리고 태산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은 모두 농민들이거나 평범한 사람들 또는 무지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는 정녕 태산에 대한 모욕이었다.)

이 작품 속에는 태산에 봉향을 드리러 나온 “愚夫愚婦”들에 대한 왕정의가 갖고 있던 무시하는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사대부 가정 출신의 좋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아했다. 이런 향객들의 무지함에 대해 왕정의는 한가지 예를 들고 있다. 태산 위에서, 많은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있었는데 이는 태산의 유려한 풍경 중의 하나였다. 왕정의가 이 나무들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다른 향객이 갑자기 다른 사람을 보고 말하길, 눈앞에 특히 크게 자란 5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그게 바로 “五大夫松”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그걸 듣고는 감탄을 하며, 그 5그루의 소나무 앞을 지나게 되면서 모두 그 소나무를 앞에 두고 절을 했다. 하지만 왕정의가 알고 있기로는 “五大夫”란 秦나라 때의 관직의 명칭 중의 하나였고, 절대 소나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태산에 처음 봉선 의식을 치른 진시황이 이곳에서 의식을 치르자, 어떤 사람들이 “五大夫松”이란 말을 만들어냈는데, 사실 이 “五大夫松”이란건 전혀 출처가 없는 소문일 뿐이었다. 이 향객들은 5그루의 큰 소나무를 두고 “五大夫松”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왕정의의 글 속에서, 18세기 말이 되었을 때 태산에 봉향을 드리러 떠나는 것이 민간에 유행하던 여행 활동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태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 위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왕정의의 가족들은 비록 진향하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유람하는 도중에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진향객들과 함께 행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론 사대부 가정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런 진향객들과 구별 짓고 있었다. 왕정의에게는 자신들이 태산에 오른 목적은 泰山奶奶에게 참배를 드리러 온 것이 아니라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것이었고 역사적인 유적지를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왕정의의 글 마지막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其所以記者,記遊事之略也。其不及乎拜禱之文者,別其非同眾鄉民進香禮岱之行也。”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여행 중의 일을 적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태산에 참배를 드리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건 이처럼 봉향을 드리러 태산에 오는 농민들과 구별짓기 위한 것이다.)

 

왕정의의 일생은 무척 짧아, 30세에 병이 들어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그녀가 외지로 나가 여행을 떠난 일에 대한 기록은 무척 풍부하다. 처음 여행을 떠난 것은 11세 때의 일로, 당시 그녀의 할아버지가 동북방의 길림성에서 관직을 하게 되어 자신의 부인을 함께 데리고 가고 싶어했는데, 왕정의의 할머니는 왕정의를 함께 데리고 떠나, 남경에서 출발해서 동북쪽의 변경으로 가는 길을 함께 하게 되었다. 왕정의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의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그녀는 할머니를 따라 길림성에서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다. 16세에서 18세에 이르는 2년 동안은 부모와 함께 생활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주 임지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녀는 서북쪽의 산서성이나 섬서성 일대를 자주 돌아다니게 되었고, 장강 중류의 호북성에서 동남쪽의 해안가에 위치한 광동성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19세에서부터 25세에 결혼하기 전까지 왕정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와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이 시기 동안에 그녀는 자주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의 친척집을 돌아다녔다. 때문에 왕정의가 일생동안 돌아다닌 지역은 중국의 북부, 동북부, 서북부, 동남부, 장강 중하류 지역에 걸쳐 있다. 이처럼 여행을 떠난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은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과도 결코 비교될 수 없는 경우였다.

사료의 한계로 인해, 왕정의와 같은 경우가 사대부 상층 사회의 여성 속에서 얼마만큼의 비율을 가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왕정의의 사례는 우리가 예전에 배웠던 “足不出戶(여성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바꾸기엔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왕정의는 여행 중에 보고 들은 것, 자신의 감상을 시, 사, 문장으로 남겨서, 죽기 전에 《德風亭初集》13권을 엮었다. 이 작품에서는 여행을 떠난 작가의 기쁨과 고뇌에 대해서 매우 생동감있게 잘 드러내고 있다.

《鱸魚》이라는 작품의 시 속에는 왕정의가 본 강가에서 물고기를 파는 모습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笑看潑剌濺香裙,巨口織鱗帶水分。一把銅錢隨驗取,但須論尾不論斤。” 이 시에서는 어부가 막 잡은 물고기를 끌어올린 뒤를 묘사하고 있는데, 어망 속에는 아직 물고기가 펄떡이는 모습이다. 물고기가 튀긴 물이 왕정의의 옷에 묻어 더러워진 상황인데 왕정의는 이런걸 처음 보는 것이라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는 동전을 꺼내 어부에게 물고기를 사겠다고 하였는데, 그제서야 강가에서 물고기를 살 때는 물고기의 무게를 달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의 개수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舟行過廬山不得泊遊悵然賦比》이라는 시 속에서는 왕정의가 여행 중에 느낀 감정에 대해서 적고 있다. 廬山은 강서성에 위치한, 중국의 명산 중의 하나이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李白은 이곳에 와서 《望廬山瀑布》이란 시를 적어 여산 폭포의 장관을 묘사하였다. “飛流直下三千尺,疑似銀河落九天(삼천척을 내려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은하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하다.” 은하수는 하늘의 별이 모인 것인데, 이백은 폭포수의 물줄기를 하늘의 별빛이 내려오는 것처럼 묘사를 하여, 이 시로 인해 여산의 폭포는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왕정의는 자신의 시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를 했다. “銀河倒向九天落,千丈瀑布飛香爐。平生有志不得遂,臥遊往往空踟躕。今年買權值於役,中流隱見浮金芙。” 이 시는 그녀가 이백의 시를 읽은 뒤에 줄곧 여산에 오르고 싶어했음을 보여준다. 아쉽게도 이 소망이 이루어지기 힘들어 보였는데, 그녀는 그저 다른 사람이 여산에 올랐을 때의 일을 적은 글을 읽고서 여산의 풍경에 대한 환상을 꿈꾸는 수밖에 없었다. 그 해에 때마침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九江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강 위에서 보니 저 멀리 여산의 풍경이 보였다. 왕정의는 배를 멈추고 여산에 올라서 여산에 오르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날은 배에서 산의 경치를 보기만 할 뿐, 배의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서 사공은 배를 멈추거나 강가에 댈 수가 없었다. 왕정의는 그저 감탄하면서 “登舟難得值風便,每每阻間留江湖。今覺乘風反怏悒,使我遊興終迴紆。”이라고 적을 뿐이었다. 이 시 속에는 배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에, 역풍이 불어 강위에서 수일을 지체하게 되었는데, 오늘은 순풍이 불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히려 더욱 더 우울해졌는데, 왜냐하면 내가 여산을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마지막에 가서는 “廬乎廬乎默相祝,回舟他日遊欽嶇。”라고 적었는데 그 뜻은 “여산아 여산아, 내 마음속으로 묵묵히 간절히 기원하건데, 배를 타고 돌아올 때 다시 여기를 지나게 되면 반드시 산에 올라 유람을 하고야 말겠다 라는 뜻이다.

여행 중에 왕정의는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된다. 이처럼 여성들이 외지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경우, 많은 경우가 가족 중의 다른 남성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常州의 徐靜雍를 만났을 때는 서정옹의 남편과 그녀의 남편이 예전부터 친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정의는 남편을 따라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서종옹 역시 재녀라는 사실을 들어왔기 때문에 서로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두 여성은 편지로 교분을 나누게 된다. 여행 중에 친구를 사귀게 되는 모습은 왕정의의 많은 시가 속에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寄和蘭畹衛姊見懷》란 시 속에서는 “軟紅十丈倦遊餘,燕市風塵載犢車。猶記德州茅店夜,共沽羅酒試銀魚。”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왕정의가 길림성에서 남경으로 돌아온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그녀는 산동성의 德州에 사는 衛蘭畹이 보낸 편지를 받게 되는데, 왕정의는 답장을 보내면서 위의 시를 적어 보낸다. 그 시는 왕정의가 북경에서 산동으로 가는 도중에 덕주를 지나게 되었을 때, 衛蘭畹과 작은 객점에서 만나게 되어 둘은 함께 술을 마시면서 銀魚에 대해 품평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왕정의가 16세 때 위란원과 알게 된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무척 좋았다. 비록 두 사람의 집이 무척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편지로 상대방 가정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위란원의 남편이 광동성으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에도 계속 왕정의와 편지로 교분을 나누었다.

왕정의의 또 다른 친구는 胡慎容으로 그녀 역시 많은 지역을 여행한 여성이었다. 호신용의 고향은 산동성의 山陰으로, 어렸을 때 부모가 모두 사망한 뒤에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광동성으로 부임을 하게 되자 호신용과 함께 떠나게 된다. 할아버지는 광동에 있으면서 자신처럼 산동성의 산음현 출신으로 광동성에서 관직을 지내게 된 젊은 관리인 馮煊을 알게 되고, 자기 손녀딸의 배필로 맺어주었다. 阮元(1764-1849)은 《兩浙輶軒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胡慎容“早孤,負夙慧,方六七歲即能信口爲韻語。……夫人從兩家宦遊,曆覽名山大川,俯仰憑吊,所作遂多隨手散佚。時而風雨一燈,擁殘書數十卷,刻苦如書生。每對江山清遠,依依系戀,低佪不能去。”

(호신용은 어렸을 때부터 고아가 되었으나 무척 총명하여 17세가 되었을 때 시를 쓸 줄 알았다. … 성년이 된 이후 그녀의 할아버지와 남편은 각지에서 지방관을 역임하였고, 호신용은 그들을 따라 각지를 여행하면서 유명한 산·강·명승지를 돌아다녔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그녀는 많은 고적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시를 남겼으나, 그 대부분은 전해지지 않는다. … 호신용은 매번 아름다운 강이나 산을 볼 때마다 항상 그곳에 남아 머무르고 싶어하고 떠나지 않으려 했다.)

 

인생의 과정 속에서 호신용과 왕정의의 길은 무척 비슷해 보인다. 둘 다 재녀라는 것 이외에도, 많은 지역의 여성들과 교분을 가졌고 “足不出戶”의 여성이 아니었다는 점도 같다. 《浙中喜悟胡慎容姊》 속에서, 왕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京華一別思方切,浙水相逢意倍慇。” “京華”라는 것은 북경을 가리킨다. 이 말은 왕정의와 호신용이 북경에서 서로 만난 사실을 가리키며, 나중에 왕정의가 남경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북경에 남은 친구를 그리워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왕정의가 절강에 오게 되는데, 호신용도 가족을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절강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호신용은 1756년 그녀의 시집 《紅鶴山莊近體詩》을 출판하였는데 왕정의 역시 《寄題山陰女士胡慎容〈紅鶴山莊集〉》라는 시를 써서 축하를 하는데 그 속에서 “縱橫排界有奇氣,由情率性何纏綿”라고 적었다. 이 말은 호신용의 성격이 대단히 명랑하고 올곧아서 일반 여성들의 유순함과는 달랐다는 뜻이다. 하지만 왕정의 역시 자신을 “平生雅負丈夫志”(사내 대장부와 같은 뜻을 가진 여성)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신용을 더욱 친밀하게 느꼈다. 또한 이 두 여성의 독특한 성격은 이 두 사람이 남성들과 함께 사방을 여행하면서 많은 인생 경험을 얻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층 사회 여성의 여행과, 상층 사대부 사회 여성의 여행을 비교해 보면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층 사회 여성의 경우 진향은 여행을 할 수 있는 주된 기회 중의 하나였고, 그녀의 목적지는 대부분 큰 사찰이 있는 지역이 되었다. 또한 그녀가 여행을 하는 행동은 혼란하고, 세속적이었으며 진향단의 구성도 무척 복잡했고 가정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비록 진향을 드리러 떠나는 것은 민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는 행동이었던 것과 달리, 사대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대개 무시되었다. 비교적으로 사대부 계층의 여성이 진향단에 참가하는 경우는 무척 적었다. 그녀들의 여행 경험은 대부분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가족 내 연장자 혹은 남편을 따라서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들의 여행 범위도 훨씬 넓어 여러 지역에 걸쳐 움직였다. 예를 들면 왕정의가 여행을 했던 길림, 호북, 광동 등 지역은 일반 진향을 떠나는 여성들이라면 찾아보기 힘든 지역이었다. 비록 서로 다른 목적과 의미를 갖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여행이었지만, 명대 말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가정을 떠나 타지를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하는 것은 갈수록 보편적인 일이 되었다. “三寸金蓮”을 한 여성들의 여행에 대한 열의는 전통시대 여성들이 가졌던 일상 생활에서의 또 다른 층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2010년 2학기 나효상 선생님 수업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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