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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청대 토지세의 재정적 중요도

by Mr. Trollope 2011. 6. 18.

Yeh-Chien Wang, "The Fiscal Importance of the Land Tax During the Ch'ing Period",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30, No. 4, 1971

 

토지세는 농경 국가에게 정부 재정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예를 들어 조세 기록을 갱신하는 어려움, 인플레이션일 때 토지세의 탄력성 부족, 다른 유효한 조세 수입의 증가) 다른 세금에 비해 토지세의 중요도는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감소하게 된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경우를 예를 들어, 막부 재정은 그 통치 전반기에는 세입의 대부분을 토지세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840년대 초에는 세금의 절반 이상이 농업이 아닌 곳에서 나왔다. 이에 더해, 영국령 인도에서는 토지세는 18세기 말에 이르렀을 때에는 중앙 그리고 주 정부 세입의 70%에 달하는 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 비중은 1910년대에 들어와서는 1/3로 감소했다. 비슷한 경향이 특히 19세기 중반을 지난 청대(1644-1911) 중국에서도 일어났다. 본고에서는 청조 전반기에 걸친 중국에서 토지세의 재정적 중요도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겠다. 본 연구는 중국의 조세 구조에서의 양적인 변화를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청조 전부의 본질과 농민들에게 지워진 조세 부담에 대해 조명하는데 까지 이를 것이다. 특히 고려해본 결과 실제 조세부담이 증가하지 않았다면 전통적인 테제 즉 왕조의 몰락이 조세 부담의 압박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재검토 되어야만 할 것이다.

세금의 재정적 중요도를 평가하기 위해선 모든 세금들이 동일한 시점에서 징수된 세금에 대해 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청 전반기 세금은 대부분이 전통적인 것이었지만, 아편 전쟁 (1840-42)과 태평천국운동(1850-64) 이후에 새로운 세금이 등장해 정부 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통적인 세금은 토지세에 더해 염세, 특산세, 잡세를 포함하고 있다. 토지세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구성 : 지정은(地丁銀, 말 그대로 전부(田賦)와 요역(徭役)의 합)으로서 은으로 징수되었는데, 세곡(稅穀)은 원래 곡식으로 징수되었지만 청 말에는 돈으로 환산되어 지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잡세는 양도세, 상업세, 중개료, 일정량의 지방세 등을 포함한다. 새로운 세금으로는 해관세, 이금세(厘金, 상품 통행세), 지역의 상거래시 그리고 영업소에서 징수하는 다양한 명목의 것이 있었다. 비록 청대 세금에 관한 일부 자료만 남아 있지만, (서양의 관리 하에 있던) 해관세 등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다른 대부분의 납세 신고서는 중앙 정부에 의해 고정된 조세의 할당된 몫을 보여줄 뿐, 백성들로부터 실제 거두어들인 금액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세금에 대해서 신중하게 이루어진 강력한 검증이 필요하며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록되지 않은 세금에 대해 추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작하기에 앞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하나는 조세의 정의이며 다른 하나는 조세 자료에 대한 선택이다. 이곳에서 징수된 세금은 기본 세금(세금의 할당량)의 총합으로 정의되며 다양한 명목의 세금이 모두 포함된 값이다. 기본 세금은 정부에 의해 정해진 비율에 따라 그 양이 결정되어 징수되었다. 대부분 공식적으로 징수된 세금이 아니라 공인된 세금 이를테면 火耗 (용해 비용이란 뜻)이나 관습적인 세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수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후자는 그러나 절대권력 혹은 일반에게서 행정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묵인 혹은 공공연히 받아들여진 세금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징수된 세금의 경우는 기본원칙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그것이 공적인 것이든 관습적인 것이든 걷힌 세금을 고려하는 데에서는 배제하였다. 본고가 의미한 전체 세금이란 중앙, , 지역의 모든 수준의 정부의 몫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의 조세 구조에서 토지세가 차지하는 재정적 중요도를 평가하기 위해 나는 1753년과 1908년의 것을 중점적으로 관찰하기 위한 자료로 선택했다. 선택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두 해의 것이 완벽하고 믿을만하며 조세 징수에 관한 이용 가능한 자료를 갖고 있다. 둘째, 위의 두 해는 왕조의 주기에서의 두 개의 대조적인 시점을 대표하는데, 하나는 만주족 왕조의 절정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쇠락이다.

공식적으로 18세기 중엽에 징수된 세금은 일반적으로 왕조의 다른 시점에 거두어들인 것보다 훨씬 믿을만한데, 왜냐하면 할당되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려는 중앙 정부의 노력이 공공의 통제 아래 비교적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전반기에 만주족 정부는 옹정제(재위:1723-35)의 왕성한 지도력 아래 주요 세금에 대한 의미 있는 개혁에 성공하였다. 복잡하고 불규칙적으로 토지세가 부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관습적인 세금(모선)의 징수를 공식적으로 허가했으며 다른 나머지는 모두 없애도록 명령했다. 모선에서 발전하여 양렴은(청렴함을 장려하는 돈)이란, 뜻깊은 봉급이 되어 총독에서부터 지현에 이르는 관리들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염세와 관세의 운영 부문에서는, 그는 모든 징수 관원들은 관습적인 세금을 공식적으로 만들도록 요구했으며 그들이 거두는 세금은 기본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고 지금껏 몰래 거두어들이던 것은 두 부분-하나는 운영상의 지출 혹은 개인적인 비용, 성 내의 공적인 필요에 의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나머지는 중앙정부에 잉여 부분으로 보내거나 혹은 간단하게 할당량에 편입시키도록 하였다. 그 결과, 비공식적으로 널리 시행되던 세금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수많은 징수 관리들은 잉여분을 할당된 몫에 더해 보고하였다. 건륭제(재위 1736-95)는 그의 재위기간의 전반기동안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정 운영의 능률을 유지하고 심지어 상승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공적인 조세 기록이 상대적으로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다.

1790년대 이후 그러나 제국 정부는 활기를 잃고 징세 기록은 점점 더 형식적인 문제가 되어갔다. 따라서 징수의 질은 점점 왕조의 멸망과 함께 나빠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족 정부는 그들의 말기에 중앙 정부와 지방 성 정부 및 (향신으로 대표되는) 지역 공동체의 도움을 모아 유례가 없는 재정 조사에 착수하였고 재정설명서(1915년 발간되었다. 이하 TCSMS)로 알려진 23개 성의 경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세금, 그 중 토지세, 특히 1900년대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 비록 이 보고서는 질적으로 각각 상이하지만, 한때 중국이 보유했던, 제국의 일반 재정에 대한 신뢰할 만하고 현실적이며 의심할 여지없는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더해 해관세의 내역으로는, Lo Yu-tung의 이금세 연구와 수백 개의 부지(附志)가 또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청 말의 징세에 대한 더 신뢰할만한 추정을 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출간된 공식적인 징수 기록에서는 오직 1753년의 자료만이 전 지역에서의 염세와 특산세 등을 포함한 모든 세금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이들 자료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의 조세 운영에 대한 상대적으로 정돈된 자료를 보여주므로, 우리는 이를 기본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도표1은 당시 중국의 조세 기록을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에서 (1) 상식적으로 어긋나는 부분이라면 수정하고 (2) 1753년의 세금 기록에 포함되지 않고도 (공식적 혹은 관습적으로) 부과된 조세의 양에 대해서 추정해야한다.

수정 변환 : 도표1의 칼럼2의 토지세 수치에 대해서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첫째, 토지세는 대다수의 민전(民田)과 일부 (전체의 5%)의 둔전(屯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둔전은 1753년의 자료에서 전후의 자료와 비교했을 때 명백하게도 불완전하게 나타나 있다. 때문에 1753년 둔전의 자료는 (감숙성과 운남성의 자료는 제외하고 )1766년의 것으로 대체한다. 둘째, 1753년고 1766년의 감숙성과 운남성의 자료에서는 앞뒤의 자료와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발견된다. 아마도 스크라이버로 작성할 때 생긴 오류인 듯 하다. 때문에 두 성의 자료만은 1753년과 1766년의 것을 버리고 1745(감숙성)1736(운남성)의 것을 쓰도록 하겠다. 셋째, 돈으로 환산된 곡세의 징수를 측정하기 위해 당시 여러 지역에서의 곡물 가격에 대한 나의 추정치를 사용하였다.

부담 측정 : 앞서 지적한 대로, 옹정 연간에는 모선의 공식화라는 중요한 조세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세금이 부과된 비율은 먼저 옹정제에 의해 승인되었고, 나중에 그의 아들에 의해 수정되었는데, 지정은의 7%내지 17%로 그 수치는 성마다 달랐지만 전국 평균해서 12% 정도로 대폭 상승하였다. 모선 이외에도 두 황제가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없애기는 어려웠던 몇 가지의 세금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지방 재정 특히 아문의 관리들: 막우, 주부, 아역의 봉급에 필요한 적절한 재정 규모를 가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비공식적인 세금 중에는 평여(부가세), 해비(解費, 세금 운반비), 由票 발급비용이 대부분 보편적이었다. 물론 부과되는 세금의 그 수와 양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찾은 증거에서는 이 비공식적인 세금의 총량은 화모와 비슷하거나 약간 더 컸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관습은,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세곡과 다른 세금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곡에 부과되는 공식적인 세금은 보통 7%에서 15% 사이로 다양했다. 세곡이 지정은과 함께 합쳐져서 정부에 의해 두 세금이 같은 비율로 걷히게 된 이후로 위의 세금들도 공식 세율로 함께 걷히게 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 할당량은 12%에 상당하거나 공식세금을 포함하여 25% 정도였을 것이다.

또한 염세와 특산세의 경우도 토지세와 비슷한 수준으로 부과되었음을 밝혀주는 증거 역시 많다. 예를 들어 호북의 염세 자료를 보자. 매년 걷어야 할 653천량의 세금 외에도 징수를 담당한 다양한 아문 혹은 그와 관계된 성의 염정(鹽政)에서는 16만 량에 달하는 양을, 또는 정해진 세금의 거의 25%에 달하는 특산세의 명목으로 거두어들였다. 특산세에 대해서는 제국정부는 10%의 세금을 (어떤 지역에서는 20%) 그것도 토지세의 항목으로서 행정상 비용을 위해 인정해주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763년에 황제의 명령으로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아문 중 2/3 정도가 특산세로 걷힌 내용 중 3/4 이상이 승인되지 않았음에도 다양한 명목으로 징수되고 있었다. 엄중한 조사 결과 황제는 행정의 효율을 위해서는 비공식적인 세금도 일부는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나는 1753년의 염세와 특산세에 대한 공식적인 수치는 보고되지 않은 부분을 포함하는 만큼 증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 사회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의 상당량을 조세 행정 스스로가 소비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소문에 따르면 루이 16세의 징수 시스템은 징수액의 20%에 가까운 금액을 소비한다고 하며 18세기 이집트의 징수인들은 그들이 거둔 세금의 25%을 자신들이 갖는다고 한다. 사실상 18세기 중국의 보고되지 않은 세금은 징수 비용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아문의 추가적인 봉급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조세 행정과 무관한 공공 기금을 걷기 위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루이 14세의 프랑스, 오스만령 이집트와 비교했을 때 청 중기의 중국은 보다 효율적이었다거나 더 적은 비용으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청의 모든 세금 중에서 보고되지 않은 세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가진 것은 잡세라는 명목 하에 거두어들여진 것이었다. 잡세는 본질적으로 중앙에서 통제하기가 극도로 힘들어서 옹정제가 조세 개혁을 시행했을 때에도 건들지 않고 남겨뒀었다. 보고되지 않은 세금의 정도에 대해서는 거칠게나마 다음의 두 사례가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북서지역의 차세이다. 1753년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섬서감숙의 차세는 6,266량이었다. 그러나 1725년에 감숙성 총독이 진술한 성의 재정 기록에서는 그의 관리들이 매년 거의 32천량을 차마 무역에서 관습적으로 수취해 왔음을 폭로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광동성의 부동산 양도세이다. 이 성의 매년 할당량은 17291만량 수준에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 5년간 지역 정부는 할당량을 훨씬 상회하는 1년 평균 4만량을 징수하였다. 비록 보고되지 않은 세금의 범위라는게 성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긴 하지만, 위의 증거가 예시하는 바는 1753년 잡세의 숫자는 보고된 것보다 최소 5배 이상은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수정치를 적용하면 청 정부가 18세기 중반에 거두어들인 세금의 총량은 1년에 7,400만 량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만주족 정부의 말기 토지세로 되돌아가면 우리는 대부분의 조사가 서양인 전문가에 의해 작성된 1903년 탁지부의 보고서 및 1911년 공식 예산안에서 위와 같은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1903년 보고서와 1911년 예산안에서의 토지세 수치는 지나치게 낮다. 주로 토지세를 실제 징수하는 것에 대한 조사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이것이 어림짐작에 가까운 결과만큼이나 믿기 힘들기 때문에 보정해줄 필요가 있다. 청 말의 토지세에 대한 내 연구에서 나는 TCSMS와 수많은 지역 부지를 근거로 상세한 수정치를 작성했다. 1908년 전체 징수된 모든 종류의 세금을 포함한 값은 대략 10,240만 량쯤이다. 같은 해 해관세는 정부에서 3,290만 량의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해관세의 통계는 전술했다시피, 수정 없이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가장 믿을만한 것이다. 염세의 보고에서 탁지부는 1902년에 1,300만 량, 1907년에는 3,000만 량을 총량으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3년 뒤에 새로 독판염정처(督辦鹽政處)가 설치된 이후로 4,500만 량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처음의 수치 2개는 너무 낮기 때문에 버릴 수밖에 없다. 세금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새 기구가 지방정부로부터 조세원의 통제를 빼앗으려고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와는 독립적으로 실시된 조사에 의해 이것이 반증되었기 때문이다. 왕조가 몰락하고 1912년 일본인 전문가에 의해 실시된 조사에서 염세가 1900년대 1년에 4,750만 량에 가까움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 왕조 말기 몇몇 염구에서 실제 징수액이 탁지부에 의해 매겨진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들 자료를 종합하여 GSA가 진실에 가장 근접했다고 간주될 수 있겠다.

이금세의 경우 Lo Yu-tung의 자료는 지나치게 낮게 잡은 감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감추어진 다양한 세목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공식 보고서의 수치에 근거하여 계산했기 때문이다. 이들 보고되지 않은 부과액은 대개 2종류이다. 하나는 화폐 운용에서 나오는 잉여금이다. 예를 들어 이금세를 은으로 걷는 대신에 대부분의 징수관들은 그들이 설정한 임의의 교환율에 따라 동전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그러나 그들은 세금을 시장 환율에 따라 은으로 거두어들였다고 보고했다. 다른 하나는 여러 비용을 대개 보고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Lo의 데이터가 과소평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시된 바에 따라 추리해 볼 수 있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수정 작업이 필요하다.

1894-95년 청일전쟁 후에 몇몇 이금 징수원들은 해외채에 대한 지불에 저당을 잡히게 되었고 이들 세금의 징수는 IMS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운영권을 이양하면서 동 절강 세무국의 부국장인 G.F. 몽고메리는 1898년 그가 짜낸실제 양을 믿지 않는다며 그 양은 실제 징수된 것의 50%정도에 뿐이라고 보고했다. 10년 뒤 복건과 산서의 금융 보고서는 이금세의 보고되지 않은 부분이 복건의 경우 30%, 산서의 경우 20내지 50% 선이라고 밝혔다. 이를 사실로 놓는다면 보고되지 않은 세금을 포함시키기 위해 이금세의 수치를 40%까지 증가시켜야 함이 타당해 보인다.

Lo-yu-tung의 공식 수치 계산에 따르면 이금세의 징수는 19082,040~2,110만 량이다. 지금까지 살핀 대로라면 이금세의 실제 징수액은 3,000만 량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는 특수한 이금세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토산 아편에 대한 소비세가 그것으로 이것은 Lo의 계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왕조 말기에 상당한 양의 재정 수입을 가져 주었다. 1909KoFengShih란 토산아편 세무국은 지난 2년간 2,000만 량 이상의 세금을 거두었다고 보고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적용하면 1년간 이금세의 수입을 1,000만 량 이상을 올려 잡아야 한다.

이금세의 등장 이후, 특산세는 잠재적인 수입원으로서의 지위를 명백하게 상실하였다. 이 세금의 상대저인 빈약함은 왕조 말기에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세금의 공식적인 징수액은 1880-90년대에 1년에 300만 량에 못 미쳤다. 그러나 1902년에 390만 량으로 상승했다. 이걸 언급해야만 하는데 그러나 1902년에 특세청(native custom station)과 반경 50리 이내의 무역항은 의화단 사건의 결과 IMC의 통제 하에 있었다. 우리가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은 IMC는 중국 정부의 구식적인 방법에 비해 훨씬 근대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산품의 부분적인 이양 후에 무질서한 비용 절취 시스템은 종식되고 그것이 지역에서 지역으로 전달되었고 그 결과 세금이 증가했다. 때문에 조세의 증가는 의심의 여지없이 운영상의 변화 때문이었다.

이제 1908년의 특산세에 대한 추정을 시작해보자. 괄호가 없는 Table II의 수치는 공식적인 징수액을, 괄호 안의 수치는 나의 추정치이다. 첫째, 항목 34에 밝혀진 데이터로부터, 우리는 무역항의 50리 밖의 특산세는 1902년에 160만 량의 수입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만약 1899-1902년에 조세가 증가했다면 그건 분명 IMC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으로 1899년의 수입은 이들 세무청에서 나온 것이다. (덧붙여, 이들은 나중에 IMC의 관할 안에 들어갔다.) 또한 조세는 나머지 세무청에 의해 각각 130만 량과 160만 량 정도가 걷혔다. 셋째, 1908년의 IMC 하의 세무청은 300만 량을 거두었거나 그들이 인계 받은 것보다 2배 이상을 거뒀다. 만약 나머지 세무청이 똑같이 IMC의 관할에 들어갔다던가 아니면 이민국이 겪었던 것처럼 똑같은 개혁을 경험했다면 이들 특산세에서 걷히는 세금은 같은 기간에 걷힌 양의 두 배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추정된 값과 보고된 값을 모두 더하면 우리는 전체 조세 수입이 1908년에 670만 량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공식적인 잡세의 기록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버려야 한다. 1903년에 탁지부에 보고한 그 숫자 (350만 량쯤이다)는 전혀 쓸모가 없다. 다행히도 이 난처한 상황에 1908년의 재정보고서가 빛을 밝혀주고 있다. 광동광서귀주로부터의 이 보고서는 잡세에 대한 (비록 불완전하지만)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3성에서는 2종류의 대비되는 경제적 상황을 대표하는데 - 광동은 고도의 상업화된 지역, 광서와 귀주는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으로 이들 데이터를 합하면 전국의 잡세 명목의 세금에 대해 추정하는 바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3성은 1908년에 토지세를 모두 합쳐 650만 량이었는데, 잡세의 총합은 좀 더 많은 840만 량이다. 우선 지적해야겠는데, 광동은 도박세가 공공 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유일한 성이었다. 우리의 추정치를 올려 잡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광동의 도박세 (430만 량)를 제외시키고 이를 통계에서 분리하고 계산해야 한다. 잡세의 총합은 이를 모두 적용하고 나서 400만 량 이상 또는 토지세 합의 60% 정도이다. 만약 우리가 이 비율을 전국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잡세의 통량이 6,500만 량 (광동의 도박세 포함)으로 이것이 나라의 세금 중 마지막 항목이 된다. 모두 취합한 결과 우리는 청 제국의 멸망 직전 총 세금이 29,200만 량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Table III을 보라)

각각의 개별 항목에서 추출한 세금을 보면 청의 조세 구조에서 토지세의 중요도를 확인하는데 이제 어려움은 없어졌다. Table III를 보면 중국의 총 세금은 1753년부터 1908년 사이에 7,380만에서 29,200만 량으로 증가했다.

모든 세금 중에서 토지세는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 비중은 감소했다. 1753년에 경제의 공공 영역에서 5,420만 량 또는 전체 조세 수입의 73.5%를 차지했다. 다른 세금의 총합은 겨우 26.5%였다. 그러나 1908년에 토지세의 비중은 거의 35% 수준으로 감소했다. 비록 그 절대적인 양이 10,240만 량으로 증가했지만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만주족 왕조의 전성기 때 세금의 3/4는 토지세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들의 황혼기에 오직 1/3만이 토지세로부터 나왔다. 이러한 추세는 도표에 의해 일목요연하게 확인된다. 1753년의 세금을 100으로 잡고 우리는 토지세가 1908년에 189로 증가했음을, 나머지 세금은 968로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전체 총 세금은 396으로 상승했다.

, 그러면 청 제국의 말기에 토지세가 중요한 위치에서 밀려나게 되었는가. 앞서 지적했듯이 한 가지 분명한 이유 즉, 새로운 세금 : 해관세와 이금세, 그리고 잡다한 많은 지역세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똑같이 중요한 3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청의 토지세의 비탄력성 둘째, 토지세 운영의 비효율성 셋째, 전통적이고 사회적인 관습에 의한 억제.

토지세와는 달리 다른 많은 세금들은 물품세로서 따라서 소득 혹은 물가의 상승에 밀접하게 반응한다. 말하자면 사회의 소득 (총합 혹은 1인당 소득)이 상승하면 (소득 분배에 기여하는 바가 없더라도) 그 소비는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결과적으로 물품세도 따라서 증가하고 심지어 사회의 실소득이 전과 같더라도 조세의 절대량은 물가가 상승할 때마다 뛰게 된다. 게다가 상업화의 추세로 점점 더 자기 소비적인 상품이 시장으로 나가는 길을 더 많이 찾아갔고 이로써 물품세는 확실하게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청조 경제의 특징을 구성한다.

D.H. 퍼킨스 교수의 추정에 따르면 중국의 인구는 1750년과 1913년 사이에 2-25,000만에서 43,000만으로 상승했다. 중국의 토지는 177095,000만 무에서 1913136,000만 무로 상승했다. 더구나 중국의 토지 수확량에서도 점진적인 상승이 있었다. 때문에 중국의 총 소비는 1세기하고 반세기 동안 필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같은 기간 동안에 물가가 150% 수준으로 뛰었다. 셋째, 중국의 경제는 18세기-19세기에 보다 상업화 되었다. 이들 결과는 물품세의 필연적인 상승으로 나타났다.

청의 토지세는 다른 세금들 (특산세는 예외인데 그건 청 말기에 이금세에 의해 대부분 대체되기 때문이다) 보다 위에 언급된 변화에 덜 반응하는데 그건 토지세가 토지 면적에 근거하여 산정되며 토지의 가치 혹은 토지의 산출량에는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지의 가치에 근거한 시스템이라면 생산력의 증가 혹은 토지에 대한 수요의 증가 혹은 단순히 통화 팽창(정기적인 가치 평가가 이뤄지기에)만으로도 토지의 징수액은 상승한다. 산출량에 근거한 시스템이라면 토지의 생산력토지 가격의 상승에 따라 토지의 징수액은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두 가지 토지세 시스템은 모두 소득과 물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토지의 면적에 기반한 시스템은 그러나 물가의 상승산출량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징수액은 상승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물가는 150%로 상승했고 생산량 역시 청대 후반기에 완만한 상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청의 토지세 시스템이 소득가격 탄력성을 상실하였기에 정부의 재정은 이들 변화에서 수익을 얻지 못했다.

분명 토지세가 증가할 여지는 남아 있다. 첫째, 세금은 토지 면적이 증가함에 따라 함께 증가할 수 있다. 둘째, 세금은 세율의 증가에 따라 함께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세금 증가 시도에는 몇 가지 확인해야 할 요소가 있다. 앞서서 언급했듯, 18세기 후반과 1차 세계대전 사이 중국의 토지 면적은 4억 무로 확대 혹은 40% 이상이 증가하였다. 같은 기간에 그러나 토지세가 부과된 토지는 단지 1억 무가 증가했을 뿐이다. 지정은이 징수된 몫은 같았고 세곡은 심지어 감소하기까지 했다. 첫째, 토지에 세금이 징수되기 위해서는 등록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정부에 의한 정기적인 토지 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청조 전체 동안 전국적으로 거대한 조사는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그 결과 대개 등록된 토지의 면적으로 세금이 결정했다. 운용해야 할 재정이 느리게 증가했던 왕조 전반기에는 토지세가 부과된 토지는 충분히 증가한 것처럼 보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운영의 효율이 감소한 이후 과세 면적은 많은 성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비록 양심적이고 성실한 관료가 여기저기에서 토지 조사를 이뤄낸 경우도 존재 했지만 그런 성과는 산발적이거나 극히 희귀한 경우일 뿐 전반적인 상황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둘째, 경세(경요박부輕徭薄賦)는 전통 중국에서 황금률처럼 떠받들어졌다. 토지에의 과세를 줄이는데 성공한 관료는 지역 사회의 찬사를 얻었고 그런 경우를 우리는 막대한 양의 지역 부지 속 전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역 사회의 지지를 얻고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총독에서부터 지현에 이르는 관리들은 토지세의 양을 줄이려는 강한 경향을 보였고 또는 최소한 그들의 재임기간 동안 그 지역에 대한 세금을 늘려서는 안됐다. 때때로 자비의 상징으로서 황제가 감면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지역사회에 부과되는 토지세의 양을 지키기 위한 편리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은 바로 토지의 전환이다. 다시 말해, 소수의(혹은 더 많은) 저급 토지를 1무의 고급 토지로 바꾸거나 또는 공전(公田)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새로운 조사에서 많은 양의 토지를 발견되거나 인구의 증가가 증가하더라도 관리들은 조세 부담을 줄이고 토지세를 변화시키지 않고도 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고성제(考成制)가 있었다. 세금 징수의 기록은 상급 관료가 하급 관료를 평가하는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척도가 되었다. 하급 관원들은 평가에 따라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받았다. 이 경우 세금을 많이 매기는 것은 완전히 징수할 가능성을 낮게 만드는 것으로서 따라서 이는 좋은 평가를 받기는 글렀다는 뜻이다 더 적은 양을 부과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지역 관리들은 토지의 과세 면적이 증가하는 걸 보고하지 않으려는 것 이외에도 심지어 그럴 경우에도 그들의 재임 기간에 과세량을 줄일 방법을 찾아냈다. 마지막으로 과세율의 증가로 인해 토지세가 증가할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보자. 이는 단순히 무당 세율을 증가시키는 단순한 방법과 또는 이미 있는 세금에 추징금을 부과하는 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 가능성은 강희제(1662-1722)에 의해 1713년 선포된 영불가부(永不加賦, “영원히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 명령은 나라의 토지 세율을 영원히 고정시키고 어떤 후손도 이를 거스를 수 없는 신성한 전통으로 굳어졌다. 결과적으로 정부에게 열린 단 한 가지 가능성은 상설세 외에 임시변통의 세금을 또 다른 세금을 부과할 방법밖엔 없었다. 그리고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한 세기 하고도 반세기만에 토지세의 두 배에 달하게 되었다.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대개 토지의 소유에 근거하여 매겨지게 되는데 그래서 그건 대개 토지의 면적산출량물가의 변화에 대한 반응이 낮다. 게다가 전통 역시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특히 중앙 정부에서는 세금을 늘리는 것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 왕조 전대에 걸쳐 중앙 정부는 절대 그들이 주창해서 세금을 늘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화모의 공식화를 제외하는데 그건 토지의 조세 부담을 조정하려는 목적에서 취해진 것이 아니었다. 결국 성과 지방 정부에게 떠넘겨진 문제가 되어버렸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결손을 메울 다른 조세원을 찾아 나섰다. 예를 들어, 학위나 훈작을 판다거나 염세의 세율을 올린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중앙 정부가 전통에 집착하게 된 이후로 위신과 평판의 위험은 성정부의 문제로서 토지세를 어떤 형태로도 제한하게끔 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사실 청조 전시기를 통틀어 어떤 성 관료도 세금을 증가시키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못했다. 단지 왕조 말기에 여러 성의 총독들이 토지에 추가적인 세금을 강요했는데 그건 의화단 사태로 인한 수요 때문이거나 철도를 깔고 근대적인 학교와 관공서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한편으로 태평천국 이후에 정치적인 중심은 베이징에서 지방의 성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순무 및 총독이 부상하여 잇따라 수세기동안 부과되어 왔던 세금을 없애고 그들의 지배하에 세율을 고정시키려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성 정부는 관리들에게 세율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 없이도 효율적으로 세금 문제의 조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3번째 단계의 정부인 지역 정부는 세금을 실제 징수하며 재정의 대부분을 토지세에 의존하며 따라서 재정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수시로 세금을 올리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 방면의 지역 관청의 재량은 그렇게 허용된 것 같아 보이질 않는다. 첫째 언급한 바대로, 태평천국 이후로 세율은 고정되었고 대다수의 성에서 세율을 변경시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둘째, 신중한 지현이라면 세금을 올리기 전에 항상 향신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마련이다. 이는 왜냐하면 사회에서 그들 계급의 덕망은 관료 사회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신사들은 상급 관료에게 지현의 결정을 막아버리도록 호소할 수 있거나 심지어 그 문제에 관해서 그들을 탄핵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예외 없이 관행적으로 세율은 지역 관리들과 향신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성 정부의 승인을 통해)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절강성의 정주에서는 양회(兩會)라 불리는 지현과 (도시 및 시골의) 향신들로 구성된 토지세 위원회가 있어서 그들이 토지세를 결정하는 사실상의 권력을 행사했다. 마지막으로 지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 역시 무시될 수 없었다. 그들의 조세 부담을 늘리려는 시도가 있을 때에 직접적인 수단으로써 폭동에 의존해 왔던 수많은 사례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세금에 대한 꾸준한 수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이고 행정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힘에 의해 항상 제약을 받아 왔던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청대 조세에서의 구조적인 변화를 조사하고 청 말기 백성들에게 가해진 조세 부담의 의미에 대해 짧게나마 확인해 보았다. 1753년에서 1908년 사이에 중국의 토지세는 7,400만 량에서 1200만 량으로 증가했다. 비록 전체 세금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긴 했지만 그의 재정적인 중요도는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초창기에 그것은 3/4를 차지했으나 말기에 와서는 단지 1/3에 불과했다. 청조의 조세 구조에서 토지세의 상대적인 중요도의 감소는 해관세나 이금세와 같은 19세기 중반에 새로운 세금이 생겨났고 토지세 시스템의 소득물가 탄력성 부족, 재정 운영에서의 결함, 그리고 조세를 증가시키려는 시도를 억제하는 강력한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다.

어느 정도 조세 부담 문제와 관련해서 토지세는 왕조 말기의 가혹한 폭군과 같았다는 그런 평가를 받기에 부당하다. 만주족 정부는 가격 인플레이션을 벌충할 만큼의 충분한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못했고 때문에 토지 면적의 확장과 토지 생산력의 증가에서 오는 것에 손도 대지 못했다. 다른 많은 세금들이 토지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함으로써 그 결과 전체 조세는 1753년에서 1908년 사이에 3.5배로 뛰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토지 면적의 증가와 토지 산출량의 증가, 19세기 말 상업화와 인플레이션 속에서, 중국 경제는 조세가 늘어나는 것 이상의 속도로 확장해 나아갔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만주족 정부는 전국의 총 생산량 중에서 왕조의 전성기 때 가져간 양보다 왕조의 말기 때 더 적은 양을 가져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연구가 밝혀준 바에 의하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토지세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의 조세 부담은 1750년대보다 1900년대가 훨씬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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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시절 스터디할 때 번역한 논문.

비전공자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중요한 용어에서도 한자를 쓰지 않았다.

학부생의 실력이라 오역 투성이지만 귀찮으므로 굳이 수정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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