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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명말의 환관 위충현

by Mr. Trollope 2012. 2. 6.

위충현(魏忠賢) (1568-1627) : 본명은 위사(魏四), 본래 肅寧(지금의 하북성 남부) 사람이다. 명말의 유명한 환관으로 천계제의 총애를 받아 동창과 금의위를 장악하고, 문인 집단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숭정제가 즉위하자 명을 받고 좌천되었고, 가는 길 위에서 자살했다. 명사(明史) 권305 환관전2에 그의 전이 있다. 그의 악행이야 뭐 너무 유명하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고 다만 그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의 일과, 그리고 그 후의 나머지에 대한 내용만 할까 한다.



입궁
 
 그는 일찍이 결혼한 적이 있는데 부인의 성은 풍씨였고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싸움에 소질이 있어, 왼손과 오른손 모두 능숙하게 활을 쏠 줄 알았다. 집안이 빈궁하였으나 도박을 무척 좋아하여 많은 돈을 날렸으니, 솜씨는 좋지 못하였던 듯하다. 이상의 가정 내력 및 이력을 통해 보면 그는 일종의 시정 무뢰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생계가 막막해지자 스스로 거세한 뒤 입궁하여 환관이 되었는데, 이것이 만력 연간의 일이다. 이 때 계부의 성을 따라 李로, 이름을 進忠이라 하여 이진충(李進忠)이란 이름을 사용했다가 나중에 원래의 성으로 바꾸었고 위충현(魏忠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사례감 태감 손섬(孫暹)의 아래에 들어가 갑자고(甲子庫)의 일을 맡게 되었는데, 본래 아첨하는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였다.


희종의 유모와 결탁하다

  위충현은 태감 위조(魏朝)의 소개로 왕안(王安. =王才人. 희종 천계제의 생모다)의 아래에 들어가 그녀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것은 위충현의 일생의 하나의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당시의 황제 광종 주상락은 겨우 1개월을 제위에 있은 뒤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생전에 이씨를 총애하여 그녀로 하여금 주유교(朱由校. 뒤의 희종 천계제)를 보살피게 하였다. 이씨는 황제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게 행동하였고, 주유교가 다른 사람과 내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자신의 지배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 겨우 16세였는데, 이씨는 계속해서 그를 손에 넣고 지배하려는 욕심에 계속해서 건청궁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당시 어사 좌광두(左光斗)와 급사중 양련(楊漣), 내각의 유일경(劉一憬) 등은 이씨의 처소를 옮길 것을 주장하여 수차례의 논쟁이 벌어진 끝에, 이씨는 결국 거처를 인수전(仁壽殿)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를 “이궁의 안(移宮案)”이라고 하며 만력 연간에 있었던 정격의 안(挺擊案), 태창 연간에 있었던 홍환의 안(紅丸案)과 합쳐 “삼안(三案)”이라고 한다. 본래 이 삼안은 위충현의 운명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일부 대신들의 삼안에 대한 태도가 애매한 점을 들어 언관들은 이를 맹렬히 공격하였고 심각한 당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위충현이 집권하는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희종은 어려서부터 이씨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왔고, 그녀에 대해 지극한 정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관료 집단의 공격을 받아 떨어지게 되었지만, 이 일은 그가 관료 대신들에 대해 반감을 갖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또한 모친과 떨어지게 된 외로움은 그의 유모인 客氏 그리고 환관 집단과 가까워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희종의 유모인 객씨는 평소 환관 위조(魏朝)를 의지하였는데, 위충현이 궁에 들어오자 위조가 위충현의 사람됨을 객씨에게 칭찬하였고 이에 위충현도 객씨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유모 객씨와 결탁하게 된 일은 위충현에게 일종의 기우라고 할 수 있다. 희종은 즉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객씨를 奉聖夫人에 봉하고 그녀의 아들 후국흥(侯國興)과 객광선(客光先), 그리고 위충현의 형 위소(魏釗)를 금의위 천호에 임명하였다. 위충현은 사례감 병필태감 겸 보화삼점제독(提督寶和三店)에 임명되었다. 본래 위충현은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병필태감의 자격이 없었지만 유모 객씨의 힘을 얻어 마침내 병필태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위충현이 정국을 농단한 내용은 생략한다.



정권을 농단하던 위충현,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다

 천계 7년(1627) 8월, 희종이 병사하고, 그의 동생인 신왕(信王) 주유검(朱由檢)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17대 황제인 숭정제이다. 당연하게도, 위충현은 숭정제 역시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시도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그가 4명의 경국지색과 함께 한 알의 “미혼향(迷魂香)”을 바쳤다고 한다. 그걸 먹으면 숭정제도 어리석은 형의 뒤를 따르게 될 터이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야사는 야사로 넘길 것. 

숭정제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그는 몹시 신중하여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9월에야 그는 유모 객씨를 황궁 밖으로 내쫓았다. 10월, 위충현과 엄당을 탄핵하는 상주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1월 갑자(甲子)일, 위충현은 사례감 병필태감과, 동창 제독의 직위에서 해임되고 봉양(鳳陽)의 조릉(祖陵)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위충현은 봉양으로 내려가는 도중, 기사(己巳)일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다.


공과 

위충현은 여론을 장악하고 있던 문신 집단과 충돌하였기 때문에, 그의 결점만 최대한 극대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잘한 일은 있었는데, 그것은 국방의 부문에서의 일이었다.

1. 홍타이지가 금주(錦州)를 공격하였을 때, 영원성을 지키고 있던 원숭환은 휘하의 군대로 하여금 출전하지 말도록 명령하였고, 당시 금주를 지키고 있던 조솔교(趙率教)의 군대만이 외롭게 버티고 있었다. 금주가 후금의 맹공 아래에 위험해지자 만계(滿桂)는 나가 싸우지 말라는 원숭환의 명령을 거부하고 대담하게도 출격하여 금주를 구원하였다. 영금대첩(寧錦大捷) 이후, 위충현이 논공행상에 착수하였을 때 만계와 조솔교는 수차례의 혈전을 뚫고 공을 세웠다 하여 관직을 올려주었고, 당시 나가 싸우기를 거부한 이들을 파면하였는데, 여기에는 원숭환도 속해 있었다. 결국 위충현은 자신을 위해 생사(生祠)까지 만들어 준 원숭환에게는 출전하여 적과 싸우는 것을 거부한 죄를 물어 파면하였으며, 자신에게 아부하거나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림당의 일원인 모문룡(毛文龍)에게는 상을 내렸다. 이것은 천계 연간에 조정의 기강은 무너지고 후금의 공격이 맹렬하던 와중에도 그나마 동북 지역의 방어에서 나름의 성과가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 아닐까.

2. 천계 연간에 있었던 최대의 군사적 실패라고 한다면 원응태(袁應泰)가 요양(遼陽)을 포기한 일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원응태가 그 자리에 임용된 것은 그의 전임자였던 옹정필(熊延弼)이 문관 집단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기 때문으로 이는 아직 위충현이 집권하기 전의 일이었다. 요양이 함락된 이후 위충현은 당초에 옹정필을 탄핵하였던 문신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그들을 탄핵하였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적수였던 문관들을 공격하기 위한 사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문신의 탁상공론으로 국가 정책을 망친 일을 처벌한다는 확실한 명분이 있는 행동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나중에 위충현은 옹정필을 다시 병부상서에 기용하였지만 이후 왕화정(王化貞)이 광녕(廣寧)을 빼앗기자, 옹정필도 여기에 연좌되어 죄를 받게 되었다. 결국 옹정필은 왕화정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맞게 되지만, 본래 그를 기용한 것은 위충현이었으며, 그를 탄핵한 것은 동림당이었다. 이치상으로도 국방상의 총책임자인 그가 죄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의 죽음을 위충현의 죄로 연결하는 것은 잘못이다.

3. 위충현이 차례대로 기용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병부상서 조남성(趙南星), 손승종(孫承宗)과 병부좌시랑 원가립(袁可立)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아첨하지 않고 대담하게 직언하는 인물들이며, 명말에 많은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위충현에게 적대하는 반대파의 일원들이었다. 위충현은 국가의 변경을 지키는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적수를 기용하는 선택을 하였다. 다만 천계제가 사망하기 직전에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심복인 최정수(崔呈秀)를 병부상서에 기용하는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반항하는 원가립을 남경 호부상서 겸 참찬기무에 임명하였는데, 이는 위충현에게 그나마 개념이란게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위충현이 집권하였을 당시에, 비록 국내 사정에서는 몰라도 최소한 요동의 정세는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 손승종의 關(산해관)-寧(영원성) 방어선이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위충현이 실각하고 난 뒤 關-寧 방어선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 무너졌다는 사실을 비교해보라. 

위충현이 무능한 인물을 등용하고 유능한 인물을 내쫓았기 때문에 요동이 함락되고 청나라가 득세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위충현 때문에 명나라 정치가 부패했고 요동이 무너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4. 경제적인 측면에서, 동림당은 신사층 및 상인 수공업자의 납세를 거부하며 대지주와 도시 상업자본의 이익을 대변하였고, 위충현은 여기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했다. 도덕적인 정당성이 동림당에게 있었다는 점은 옳지만 그들이 납세를 거부한 것은 결국 국가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위충현이 집권한 이후 그는 만력 연간의 광세 정책을 유지하였으며, 대지주 계층에 대한 징세를 강화하여 나갔다. 그 결과 국가 재정은 붕괴를 면할 수가 있었다.

5. 위충현이 집권 당시 얼마나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혔음을 보여주는 증거나, 그가 제멋대로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은 없다. 사실 유근이나 엄숭 등 이전에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그가 특별히 더 탐욕스러운 것도 아니었고, 그들이 가졌던 권력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물며 위충현이 권력을 잡았던 시기도 겨우 3년여에 불과한데, 위충현의 화가 마치 전무후무로 극렬했던 것인 마냥 설명한다면 그것은 너무 과한 것이다. 위충현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길래 남들과 똑같은 시간, 똑같은 권력을 갖고 남보다 훨씬, 더 심하게 명나라를 망가뜨릴 수 있었단 말인가.

6. 흥미로운 점은 위충현이 국고에 자신의 재산을 기부한 기록이 있다는 점인데, 바로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요동 지역 군대의 병기와 마필 등을 구입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당시 요동순무였던 원숭환의 상소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廠臣魏忠賢功在社稷,海內之共見共聞,業已銘刻金石,無容職贅。至其身任邊事,誓圖恢複,梟滅逆虜,任用劉應乾、陶文、紀用等,而關內外禦敵之伏甲、軍器、馬匹、懸簾等項俱以家資置辦,日逐觧來,又助軍需。臣方一意巡緝嚴警,諸營將吏不敢貪懦營私,不敢饋遺隱串,改虛爲實,化賈爲真;易怯而勇,以有今日。從古內臣誰有出其右者?通侯之世賞宜也!”[각주:1]

또한 위충현은 자신이 앞장서서 군마를 모은 일도 있었다. 당시 요동지역의 전쟁이 급박해지자, 마필 등의 물자가 급히 필요해졌는데 이를 모으기가 어려웠다. 당시 위충현이 생각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명대의 제도에, 대신이 공적을 세우는 경우 궁중에서도 말을 탈 수 있는 특권을 주었는데 이 때 그러한 자격을 부여받은 자는 황제에게 말 한필을 진헌하는 것이 관례였다. 위충현은 일단 수백명의 환관들에게 그러한 상을 내려 특권을 내렸고 그들이 관례에 따라 말을 바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전쟁에 쓸 많은 군마를 마련할 수 있었다.  

7. 양절지역이 재해를 입었을 때, 위충현은 황가에 납입해야 하는 세금을 면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수공업자에게 물품을 납입하는데 일정한 비용을 내야만 합격시켜주는 관례가 존재하는데, 이는 명대의 내고(內庫)를 관리하는 태감들이 저지르는 악습 중의 하나였다. 위충현이 이것을 없앤 것은 덕행이라 할 만하다.


블로거의 평

나는 예전부터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환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환관이 패악을 부린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며 그것이 정치적 기강을 심각하게 훼손하였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이 집권한 기간을 살펴보면 길어야 겨우 3년 남짓에 불과한데 그 기간 동안에 나라를 망치면 얼마나 망칠 수 있었겠나? 그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들을 아래에서 받치고 있는 당시의 시스템의 문제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또한 문제인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살펴볼 때, 개인의 문제를 구조의 문제로 살펴보는 것과,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적용하는 방식의 위험에 있다. 이것은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함부로 위충현 혹은 왕진 등의 몇몇 사례를 전체로 확대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몇몇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바대로 환관의 활동은 관료 군주와 전제 군주 사이에 진행되었던 대결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진대에 등장하여 송대에 완성된 중국 관료 기구의 결함과 극복 사이에서 나타난 해프닝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위충현의 개인적인 면모를 들여다 보는 것은 분명 명대의 말기에 위치한 두드러지는 하나의 상징을 본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이고 싶다. 그는 분명 무뢰배이며, 악한이고, 정치의 기강을 어지럽힌 자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도덕적인 결함을 명대 전체 사회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해석한다거나 혹은 명대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두고 그의 정치 활동에 색깔을 입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 明熹宗七年都察院實錄, 卷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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