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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흑사병 Black Death

by Mr. Trollope 2011. 4. 22.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 모든 일이 시간에 파묻히지 않도록

그래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 모든 일이 우리 후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이 땅, 사악한 존재의 손아귀에 놓인 이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재앙을 보아 온 나는

이제 죽은 자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기다리며

그동안 내가 목도한 모든 일을 여기에 적는다.

1349년 수사 존 클라인.


수백만년 동안 인간의 주요 사망 원인은 사고와 부상이었다. 그러다가 영구적인 농경과 촌락 생활 덕분에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더욱 흔하게 되었다. 6,000년쯤 전 청동기 시대에 일어난 인구 폭발은 도시 거주민들을 어느 한계 이상으로 몰고 갔다. 도시 인구의 증가는 도시 거주민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바로 늘어난 도시 인구와 상승한 인구 밀도가 대규모 전염병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때 최초로 감염병은 인간의 주된 사망 원인이 되었다. 사실 마을이 큰 도시가 되고서야 대규모 죽음은 인간사의 일상적인 부분이 되었다. 농민과 촌락민들이 북적대며 도시로 몰려가자, 면역학적으로 처녀지였던 대중은 가축, 오물, 하수구, 쥐 등에 득실대던 세균들에게 축제의 음식을 제공하였다. 수많은 이들이 이전에는 몰랐던 전염병 즉 두창, 홍역, 볼거리, 인플루엔자, 성홍열, 발진 티푸스, 선페스트, 매독, 임질, 감기에 걸렸고, 또 죽었다. 이 질병들 다수는 오늘날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가혹함으로 사람들을 공격하였고 사회 전체를 황폐화시켰다. 역병과 도시는 늘 함께 발달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병plague 이라는 단어는 어떤 종류든 심한 유행병에 대해 쓰이지만, 6세기 콘스탄티노플을 강타한 것은 '보통 역병 a plague'이 아니라 바로 ' 역병 The plague'이었고, 이것은 나중에 흑사병Black Death이라 불리게 된 페스트pest 였다. 이것이 최초의 선페스트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의 유행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선페스트였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 중의 하나를 일으켰다. 병은 발열로 시작했다. 첫날이나 둘째날에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와 목에 림프선종(림프선 종창)이 생겼다. 열은 폭발적으로 오르고 림프선은 더욱 부어올랐으며, 병원균은 신경계를 침범하여 몽롱함이나 환각을 유발하였다. 5일째가 되면 감염자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오자 이 병은 폐페스트로 형태를 바꾸어 기침을 통해 퍼져 폐를 망가뜨렸다. 사람들은 피를 토하고 몸을 떨며 죽어갔다. 폐페스트는 당시에 95%의 사망률을 보였는데, 항생제가 없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포와 혼란과 살인이 콘스탄티노플의 거리를 가득 메웠다. 매장을 하기엔 시신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도시의 요새화된 탑의 지붕을 벗기고 시체를 통나무처럼 차곡차곡 채워넣었다. 곧 이 탑들도 가득 찼고 악취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 사망자는 하루에 1만명에 달하였고 더이상 시체를 보관할 장소도 없었다. 그래서 통나무배에 시체를 싣고 바다로 떠내려보내기도 했다. 이 역병이 종식되었을 때, 이 도시 인구의 40%가 사망하였다. 이 역병은 지중해의 모든 해안 도시를 따라 빠르게 퍼져나갔고 내륙에서는 그보다 천천히 이동하였다. 6년 내내 역병이 이탈리아, 에스파냐, 프랑스, 라인 강 유역, 영국, 덴마크를 휩쓸었다. 제국을 건설하려던 유스티니아누스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유럽의 농업은 황폐화되었고 교역은 거의 중단되었다. 많은 도시가 로마처럼 잔해만이 남았고 죽은 시체가 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구원을 빌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었다. 역병은 전역에서 200년 가량 지속되었고 이 유행이 끝났을 때 유럽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고, 남편은 아내를, 형은 동생을 버렸다. 

 어떠한 돈이나 우정으로도 죽은 이를 매장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수백명씩 죽어갔고 모두가 구덩이에 버려져 흙으로 덮였다. 

구덩이가 메워지자마자 더 많은 구덩이를 팠다. 

나, 투라의 아니올라는 이 손으로 내 다섯 아이들을 묻었다.

1347년, 시에나. 아니올라 디 투라



  이 역병의 또 한번의 유행은 14세기에 다시 한번 찾아왔다. 원래 선페스트는 인간의 질병이 아니었다. 검은왕쥐들이 귀향하는 십자군의 배를 타고 유럽에 들어갔으며 14세기에는 그곳에서 원래 살던 쥐들을 몰아냈다. 질병 보유 숙주로서 끈질긴 검은왕쥐는 불붙기만을 기다리는 화약과 같았다. 폭발은 1346년 몽골 제국의 억류에서 풀려난 제노바 상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330년대 흑사병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 인도, 중동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1340년 아랍의 연대기 작가들은 사람들이 몽골에서부터 아르메니아까지 연쇄적으로 죽어갔다고 기록했다. 1346년 흑사병은 대상의 이동 경로를 타고 카파Kaffa 라는 크림 반도의 항구로 서진하였다. 이 도시는 3년 동안 킵차크 한국의 통치자 야니벡의 포위 아래 있었다. 역사인지 전설인지 모를 기록에 따르면 몽골이 떠나면서 시체의 산더미를 남겨놓았는데, 이 때 마지막으로 무서운 작별 인사를 했던 모양이다. 즉 그들은 공성기를 이용해서 감염된 시체들을 카파의 성벽 안으로 던져넣었다고 한다. 포위된 사람들은 시체들을 카파의 성벽 너머 바다로 다시 던져 버렸지만 이미 페스트균은 카파로 들어왔다. 사실이든 아니든, 어쨌든 흑사병에 걸린 몽골군은 후퇴하였고 제노바 상인들은 자유롭게 고향으로 향했다. 1347년 여름 그들은 서둘러 배를 몰아 이탈리아로 항해하였다. 그들은 감염된 쥐들도 함께 배에 태웠음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그들이 닿은 지중해의 항구들마다 흑사병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흑사병을 이탈리아의 다른 항구로 전해주었다. 이들로부터 흑사병은 배를 타고 다른 지중해의 항구로 빠르게 번져나갔으며, 유럽의 주요 하천을 따라 대서양 연안의 마을과 도시들에까지 퍼졌다. 사람들은 항구 도시들을 떠났지만 많은 이들이 길가의 여관에서 흑사병으로 쓰러져갔다. 1347년 말 날씨가 추워졌을 때 흑사병은 남부 유럽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것은 가장 무서운 폐페스트의 형태로 되었으며 더욱 빠르게 이동하였다. 이 병은 1348년 영국에 도착하였다. 동시에 동쪽으로는 육로를 통해 모스크바까지 배를 타고는 페르시아 만 걸프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 및 나일강 델타 지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8세기 전에 기술된 증상들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 에서도 반복된다. 사람들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림프선종이 나타나서 사과만큼 커졌으며 전신에 퍼졌다. 검거나 자주색인 반점이 피부에 나타나면 죽음이 확실했다. 폐페스트 또는 패혈증 유형에 걸린 사람들은 아침에는 멀쩡하다가도 밤이 되기 전에 피를 토하며 죽었다. 선폐스트 환자의 절반 이상이 죽었고 폐페스트나 패혈증 페스트의 경우는 거의 다 죽었다. 사망자 수를 알고자 했을 때 교황 클레망 6세는 4,200만명이 죽었고 그 중 2,500만 명은 유럽인이라는 보고를 들었다. 중세의 사망 통계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최근 수십년 동안 어떤 역사가들은 흑사병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사망자의 추정치를 줄였다. 그러나 유럽 전역의 도시 기록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죽음이 여러 연대기 작가들이 주장한 만큼이나 무시무시했음을 보여준다.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밀라노 같은 몇몇 도시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어림잡은 추정으로도 이탈리아 인구의 최소한 3분의 1 내지 절반이 죽었으며, 아마 프랑스, 영국, 러시아, 폴란드, 발칸 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비율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런던과 로마에서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었고 스몰렌스크시에서는 겨우 다섯 명만 살아남았다. 유럽은 전 인구의 4 분의 1 내지 절반을 잃었다. 이런 죽음은 구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끔찍한 것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흑사병의 습격을 받고 붕괴하였다. 북아프리카는 폐허가 되었고 이슬람 세계는 인구의 3 분의 1 내지 절반 가량을 잃었다. 인도도 비슷한 비율의 고통을 겪었다.


흑사병의 원인을 몰랐으므로 사람들은 그저 치료법을 추측만 할 따름이었다. 그들은 하제, 사혈, 훈증, 림프선종의 소작, 오줌 목욕 따위를 시도해 보았다. 베네치아인들은 도착한 배를 40일 동안 격리하는 검역법을 고안했다. 고립된 것은 선원들 뿐이었고 쥐들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이 방법은 흑사병을 막는데 실패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흑사병이 도착하였을 때 죽어가는 쥐들이 그 소굴에 널려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아무도 그것을 인간의 전염과 결부시키지는 못했다. 사실 전염이라는 개념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瘴氣, 지진, 혜성, 고양이, 개 나환자, 집시 그리고 특히 유대인들을 탓했다. 늘 그렇듯이 역병은 신의 천벌로 보였다. 오로지 가장 극악한 집단과 개인의 죄만이 이 많은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유럽의 거리마다 수만명의 편타고행자들이 자신을 채찍으로 갈기며 속죄함으로써 신의 분노를 달래려 애썼다. 처음에 교황은 그들의 행진, 집회, 그리고 ‘내 큰 탓이오Mea maxima culpa’라는 외침소리를 축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수가 많아지고 폭도로 변하여 종교화되자, 교황은 칼과 불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물론, 그래도 흑사병은 계속되었다.


사랑하는 로라를 흑사병으로 잃은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후손들이 자신의 시대를 단지 꾸며낸 이야기로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손들은 텅 빈 집, 버려진 마을, 고통, 광기, 죽음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믿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야! 흑사병 시대의 연대기 작가들과 기록자들이 남긴 글들은 여전히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죽은 엄마로부터 젖을 빠는 아기, 고급 의복과 보석을 걸친 채 텅 빈 저택을 어슬렁거리는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 거리에서 벌어진 벌거벗은 사람들의 주연, 시체들만 싣고 바다 위를 떠도는 유령선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아비뇽에서는 더 이상 매장할 땅이 없어서 교황이 론 강에 축복을 내리고 강 속으로 시체를 던져 넣었다. 대체 어떻게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두다니! 아니. 사람들은 그랬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내팽개친 채 도망쳤다.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쳤고 의사들은 환자 곁에 오기를 거부했고, 모든 사제들도 신자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이 돌발사태는 인간과 다른 여러 종 사이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일련의 조우에 의해 생태학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점화된 것이다. 페스트균이 살아 있는 설치류로부터 도시의 인간에게 어떻게 옮겨졌는지를 알려면, 그것이 타고 여행하는 벼룩의 경로를 따라가 보아야 한다. 선페스트는 막대기처럼 생긴 페스트균에 의해 발병한다. 페스트균은 오랫동안 들쥐, 다람쥐, 마멋과 같은 야생 설치류의 동반자였다. 페스트균은 숙주의 피를 빠는 이들 설치류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통해 옮겨진다. 페스트균은 벼룩의 장에서 증식하면서 폐색을 일으킬 정도의 덩어리로 커져서 벼룩이 피를 빨 때 배출된다. 벼룩은 이 균을 한 쥐에서 다른 쥐로 옮긴다. 이러한 고대의 설치류-벼룩-세균 관계는 대개 제한된 정도의 주기적인 질병을 일으켰다.


친숙한 숙주 안에서 선페스트는 2-20년의 주기를 보이며 명멸한다. 기후와 먹이의 변화가 집단의 증식을 일으키면 그러한 밀집 상태가 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병은 자연 숙주에 대해서는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과잉 증식에 대한 브레이크로 작용한다. 그러나 페스트균이 설치류 사이에서 나와 낯선 종과 만나게 되면, 그것은 자연계에 있는 가장 무서운 균 가운데 하나가 된다. 페스트균에 익숙하지 않은 설치류도 익숙한 개체와 접촉하여 세균에 감염된 벼룩을 옮을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집쥐가 들다람쥐의 벼룩으로부터 흑사병을 얻었다면, 이 집쥐의 벼룩은 그 숙주로부터 페스트균을 얻게 된다. 이 집쥐가 흑사병으로 죽는다면 벼룩은 새 집을 찾아 떠난다. 그래서 치명적인 유행이 집쥐들 사이에 퍼지게 된다. 만약 인간이 가까이 있다면 벼룩은 인간을 물어 재앙을 유발한다. 분명히 이것은 예기치 않은 조우의 최종 결과이다. 인간 세상에서 흑사병 유행의 위험은 농장과 도시가 대량의 스캐빈저, 특히 검은왕쥐black rat 를 불러들였을 때 등장하였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역병의 여러 단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이 질병은 인도와 중국 사이의 히말라야에 사는 설치류 사이에서 수천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중국, 중동,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의 야생 설치류에게 퍼졌다. 그러나 이 병은 여전히 인간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사냥꾼이 감염된 동물을 죽인다든지 할 때에만 산발적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2,000년 전의 알려지지 않은 환경 변화는 설치류의 먹이 공급을 증가시켜 그 무리의 숫자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당연히 페스트균 감염이 발생하였다. 그러한 감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인도산 검은왕쥐를 끌어들인 인간의 정착지가 생겨났던 것이다. 검은왕쥐는 감염된 야생 설치류와 사람 사이를 매개하였다. 그것은 야생 설치류로부터 페스트균을 받아 자신들의 벼룩을 감염시켰다. 가장 흔한 쥐벼룩은 그 숙주만큼이나 끈질기고 기회에 강하다. 이 쥐벼룩은 늘 병든 쥐를 버리고 떠난다. 처음에 사람들은 흑사병을 서로 전염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곧 두가지 요소가 이 질병을 증폭시켰다. 하나는 자연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적인 것이었는데, 바로 추운 기후와 선박이다. 추운 기후 때문에 페스트균이 림프선에서 폐로 옮겨갔고, 폐페스트는 기침을 통해 사람에서 사람으로 바로 전파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배는 흑사병에 감염된 쥐들을 더 멀리 더 널리 실어 날랐다. 잽싼 등반가인 이 검은왕쥐는 배의 로프를 타고 오를 수 있었고 배와 흑사병은 배를 타고 이집트로부터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하였으며 거기서 유럽의 항구들로 들어갔다. 흑사병이라는 말은 두번째 유행이 시작되고 두 세기가 흐른 뒤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때 이후 유럽인들은 이것을 대몰살Great Dying 이라 불렀다. 이것은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등지에서 4분의 1 내지 절반 가량의 사람들을 들어냈고 인구는 15세기 후반까지 감소하였다. 사회는 파괴되었고 질서와 구조는 기능을 잃었다.


이 병은 오늘날에는 만나기 힘든 병이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발병은 1665년이었으며 다니엘 디포는 이것을 '흑사병 해의 기록Journal of the Plague year'에서 묘사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720-1721 마르세유에서 있었다. 이집트나 동남아시아와 같은 지역에서는 20세기까지도 때때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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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사라는 것은 중국사 영역 속에서 최근까지도 그렇게 활발한 분야가 아니었다. 초기의 질병사 연구는 1920년대 의학사의 일환에서 시작되었으며 1950년대까지는 대개 의학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춘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1980년대가 되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질병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그 공간이 광대하기 때문에 지역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며 이 점은 질병사 연구에서 매우 커다란 어려움을 제공한다. 질병이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자극하기 때문에 기록에 남기 무척 어려운 부분이며, 관찰자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이성과 공포, 관찰과 풍문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얼마전 명청사학회에 참가하였다가 흥미로운 발표를 들었다. 명지대학교에서 석사학위논문을 발표한 김현선 씨의 「명청시대 장강 중류지역의 疫病- 호북성을 중심으로」가 그것이다. 예전부터 아련하게 남아있던 호기심을 자극하였기에, 이에 관한 긁어오기 포스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중국사에서 질병사에 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않기에 참고할 연구가 별로 없었다. 집에 남아 있는 몇권의 책을 짜깁기해서 이렇게 적는다.

 

이 포스팅의 내용은 대부분 다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노카렌 저, 권복규 역, 『전염병의 문화사』, 사이언스북스, 2001 의 5장과, 6장 

코니 윌리스 저, 최용준 옮김의 『둠즈데이북』, 열린책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