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명 인종 홍희제

by Mr. Trollope 2010. 8. 7.

인종(仁宗) 홍희제(洪熙帝) 주고치(朱高熾). 1378-1425.

명 조 4번째 황제로서 영락제(永樂帝)의 장자로 태어났다 영락(永樂) 2년 (1404) 황태자가 되었으며 영락 22년 (1424) 제위에 올랐다. 이듬해 연호를 홍희(洪熙)로 정했다. 재위 기간은 1년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홍희제가 마련한 정책과 업적은 뒤를 이은 황제들이 수성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는 평을 받는다. 



주고치는 1378년 8월 16일 명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장자로 모친은 서황후로써 개국공신이었던 서달(徐達)의 딸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인 연왕(燕王) 주체(朱棣)의 나이는 겨우 18세였다. 주고치는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문예를 좋아하여 그가 비록 활쏘기 등의 무예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유가 경서를 읽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 주원장(朱元璋)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홍무 28년 (1395) 연왕 왕세자로 봉해졌다. 


홍희제에 대한 문약한 서생이다 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순히 글만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난의 역(1399-1402)의 기간 동안 연왕이 요동을 제압하기 위해 떠난 사이에 1399년 11월 이경륭(李景隆)이 대군을 이끌고 본거지인 북경을 공격하였을 때, 그는 1만의 군사를 갖고 성공적으로 북경을 방어해냈는데, 이는 그가 문예 이외에도 리더쉽과 판단력을 보유한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영락 2년 (1404) 황태자로 봉해졌고 영락 7년 (1409) 이후부터는 성조가 북벌에 참여하는 일로 자주 북경에 머물렀으므로 그는 남경에서 황제의 대리 임무(監國)를 수행하였으며 국가의 일상 정무를 처리하면서 정치와 행정에 관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영락 19년 (1421) 정식으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황제를 따라 북경으로 옮겨갔다. 그가 남경에서 보여준 실적에도 불구하고 동생이었던 한왕(漢王) 주고희(朱高熙), 조왕(趙王) 주고수(朱高燧)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그가 문무에 재능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날 때부터 장사의 풍채가 있었던 아버지 주체와는 맞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락제는 황태자를 바꾸려고까지 하였지만 양사기(楊士奇) 등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 밖에 태자비(太子妃) 장씨(張氏)와 황태손(皇孫) 주첨기(朱瞻基, 후일의 선덕제)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그를 황태자로 남겨두었다는 설도 있다. 


영락 22년 7월 (1424) 영락제가 원정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당시 주고치는 북경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락제의 유언을 듣지는 못하였지만, 대학사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과 상서 건의(蹇義), 하원길(夏原吉) 등의 지지 하에 제위에 올랐다. 이듬해 연호를 홍희(洪熙)로 정하였다. 그가 통치의 방향으로 잡은 것은 조정의 폐단을 혁파하는 것과, 오랜 전쟁으로 심화된 백성의 고통을 경감하고, 관료제 내의 비효율과 무능력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또한 북벌에 반대하다가 하옥된 하원길 등의 구신을 석방하고, 여러 대신들을 복권시켰으며 건문제(建文帝) 아래에 있다가 몰관된 대신들의 가속을 사면하였다. 정화의 원정을 중지시키고, 여러 가지 부담을 줄임으로써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의 후손들과는 달리, 할아버지와는 비슷했던 그는 매우 부지런한 황제로 매일 그의 신하들을 불러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구하였으며 홍무제에 의해 억눌렸던 내각의 권한을 부활시킨 것도 바로 이때였다. 또한 홍무-영락 연간으로 이어지는 강압적인 통치 방식에서 직언을 장려하였으며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본래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기 때문에 등극 후 겨우 8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홍희 원년 5월이었다. 시호는 경천체도순성지덕홍문흠무장성달효소황제(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欽武章聖達孝昭皇帝)로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헌릉(獻陵)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현재 북경 창평현(昌平縣)에 있으며 1426년 마련되었다. 그의 일생은 묘호에 붙여진 “인(仁)”이라는 한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