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은 천계 7년(1627) 1월부터 4월 사이에 있었던 중국(명)-후금-한국(조선) 사이에 있었던 보다 큰 전쟁의 일부분이며, 그 중 조선의 영토 안에서 일어난 전쟁만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이 전쟁은, 후금의 입장에서, 명조가 동강진(東江鎭)에 배치한 모문룡(毛文龍)의 부대를 제거하고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후금은 겨울철이 되어 강이 얼어붙는 시기를 틈타 조선인의 협력 아래에 10만의 군사를 동원, 동강진을 공격하였지만 성과가 크지 않았다. 이에 방향을 전환하여 조선을 공격하였고(정묘호란) 조선의 북방을 약탈하였다. 이에 명조의 군대가 구원하기 위해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여 압록강 북쪽 연안에서 후금군과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서 후금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많은 사상자를 낸 뒤 (명군의 피해 약 6천, 후금군의 피해 약 8천) 후퇴하였다.
1. 배경
사르후 전투의 패배 이후 명조는 요동을 상실하고 그 영향권은 크게 축소되었으며, 후금이 빠른 속도로 요동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천계 원년(1621), 명의 장수 모문룡이 요동의 병력을 규합하고 금주(金州), 여순(旅順), 관전(寬奠), 애양(靉陽), 선성(旋城) 등의 토지를 회복하는 등, 후금의 후방에서 활약하자 후금은 이것을 커다란 위협으로 여기게 되었다. 1후금은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자신들의 군사 행동이 모문룡의 배후 공격으로 인해 제약을 받게 되자 누차 이를 공격하여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줄곧 성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천계 6년(1626) 8월,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후금을 장악한 홍타이지는 명-후금 사이의 교착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후방에 자리 잡은 모문룡의 군대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이 전쟁에 관한 후금의 목표는 《滿文老檔》 속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천총 원년 정월 초8일, 버일러 아민 등에게 명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의 모문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같은 날, 팡기나(方吉納) 등을 통해 영원성의 원숭환에게 서신을 보내 화의를 맺기를 청하였다.
.... 먼저 조선은 수대로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번의 정벌은 조선을 정벌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고, 명의 모문룡이 조선 근처 섬에 주둔하여, (후금을 피해) 도망한 사람들을 누차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나는 노하여 이를 정벌하고자 한 것이며, 만약 가능하다면 조선도 공격하여 빼앗을 것이다. 고로 이번의 출병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이것은 후금의 주요 공격 목표는 바로 모문룡의 군대였으며, 조선은 2차적 목표였음을 보여준다.
2. 전쟁의 발발
천계 7년(1627) 초, 홍타이지는 팡기나(方吉納)를 대표로 한 사절을 파견하여 당시 요동 순무였던 원숭환(袁崇煥)을 상대로 화의를 제안함으로써, 명조를 혼란시키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양람기(鑲藍旗)의 아민(阿敏), 양백기(鑲白旗)의 아지거(阿濟格), 양홍기(鑲紅旗)의 요토(岳托), 버일러 지르갈랑(濟爾哈朗), 데두(杜度), 소토(碩托), 총병 이영방(李永芳) 등을 파견하여 동강진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출동한 후금군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원숭환은 그들이 10만이라고 주장했다. [2] 일설에는 8만이라고 한다. 조선측에서는 분명 모뮨룡의 군대가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후금의 군대가 모문룡을 공격하는 것에 협력하였다. 이들 조선인들은 후금군을 위해 길잡이가 되는 한편, 명군을 속일 수 있도록 조선인의 의복을 빌려주기까지 하였다.[3]
후금군은 조선인의 도움으로 철산(鐵山)을 포위하였는데, 이 때, 철산에는 모유준(毛有俊) 등이 천여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은 후금군과의 전투 끝에 전멸하였다. 철산을 점령한 뒤 후금군은 추운 날씨로 수면이 얼어붙은 것을 틈타, 공격을 계속하여 3리 근방의 운종도(雲從島)를 공격하였다. 모문룡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후금과 대치하는 한편 모유견(毛有見), 우경화(尤景和) 등을 파견하여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였다.
후금군의 대장 아민(阿敏)은 부대의 손실이 너무 큰데다 전과가 여의치 않고, 모문룡을 격퇴할 가능성이 보이질 않자 부대의 방향을 선회하여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심, 조선의 의주와 안주를 공격하고 이곳을 약탈한다.(정묘호란) 아민은 가능하다면 조선의 왕을 사로잡고 자신이 조선의 왕이 되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으며, 부대를 깊숙히 전진시켜 한양을 목표로 이동하였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인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후금을 도와 모문룡을 공격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자신의 신하들이 잘 모르고 저지른 죄이므로, 잘못을 용서하고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당시 명나라의 천계제는 조선이 비록 후금을 도와 명조를 공격하였지만, 조선이 후금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불리한 결과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모문룡에게 명령하여 조선을 도와 출병하도록 하였다. 2
모문룡은 천계제의 조서를 받은 이후 명령에 따라 부대를 이끌고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3모문룡의 군대와 후금군은 선주(宣州), 안정(晏庭), 거련(車輦), 의주 등지에서 수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더욱이 날씨가 풀리고 바다와 강의 얼음이 녹자, 모문룡의 군대는 배를 타고 바닷길과 강물을 따라 더욱 더 기동성 있게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4모문룡의 군대는 천가장(千家莊), 병산(瓶山) 일대에서 후금군의 주력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곳에서 후금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5아민은 날씨가 점점 풀리면서 모문룡의 군대에게 이롭게 변하고, 또한 조선과 후금의 군대가 후방의 위협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형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되자 조선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부대를 후퇴하기로 결정하다. 6 결국 전쟁은 모문룡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었다.
3. 전쟁의 결과
이 전쟁에서 후금은 모문룡이 철산(鐵山)에 주둔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조선인의 협력 아래에 철산을 공격 함락하였지만, 결국 모문룡을 처치하지는 못하였다. 만약 후금의 공격이 성공하였다면 1차적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전세는 크게 바뀌었겠지만, 어쨌든 실패하면서 모문룡의 반격을 허용하였고, 전쟁은 장기화되었으며 끝내 커다란 피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후금군의 사령관 아민은 철산을 공격하여 모문룡을 제거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운종도 역시 함락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목표를 수정, 조선을 공격함으로써 “동쪽의 실패를 서쪽에서 메우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을 노략하여 당시 후금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한편 조선을 명조로부터 떨어뜨리고 후금의 세력권 아래로 넣음으로써 정치외교적 성과까지 거두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반대로 후금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때로는 협력하던) 조선이 후금을 버리고 친명 정책으로 선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이것은 사령관인 아민이 성급하고, 정치 모략적 식견이 부족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길어지게 되어 날씨가 풀리면서, 땅은 질척해지고 얼음이 녹으면서 기병 위주의 후금군은 행동력에 제약이 생기는 한편, 조선군과 명군에게는 이로운 조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압록강 이남에서 고립될 위기에 처한 아민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병산(瓶山) 전투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쟁은 모문룡을 제거함으로써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던 홍타이지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뜻하며, 이후 홍타이지의 방향은 외교적, 정치적 수단을 활용하는 것으로 선회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원숭환을 이용하여 모문룡을 제거했다.” 7하지만 대신에 홍타이지는 최소한 2개의 기(旗)를 댓가로 치러야 했는데, 그것은 아민의 양람기와 아지거의 양백기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로서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였기 때문에 명과 조선의 힘을 빌려 이 둘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 결국은 홍타이지 자신에게는 이로운 결과였다고 할 수 있겠다.
4. 동시대인의 평가
명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전쟁은 후금의 정예병력의 하나였던 양람기의 병력을 소진시키고 여기에 참전한 다른 후금의 군대에게 큰 손실을 입히는 성과로 끝을 낸 전쟁이었다. 이것은 후금이 발흥하여 명조와 전쟁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본토와 지극히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상당히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승리에 대해 당시 명대 사람들이 남긴 평가는 대단히 후했다. 8
하지만 이 전쟁에 대한 한국 측의 기록은, 조선의 의병과 관군의 협력으로 후금에게 피해를 입혔으며, 모문룡은 섬에 틀어박혀 일절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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