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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어떻게 해서 원숭환은 영웅이 되었는가

by Mr. Trollope 2013. 3. 2.



원숭환의 공적은 사실인가.



중화민족의 영웅, 외세의 침략에 거세게 저항했던 원숭환은 수차례의 전투에서 외적을 물리쳤지만, 홍타이지의 계책에 속아 넘어간 숭정제의 어리석음으로 목숨을 잃었다. 결국 명나라는 이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원숭환이 전공을 세웠다는 2가지 전투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

 


1. 누르하치를 죽인 것 영원성 전투


  누르하치의 죽음에 관한 일설에 따르면 이 때 누르하치가 원숭환 군대의 대포를 맞고 사망하였거나 or 중상을 입고 귀국한 뒤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주장의 근원은 조선 사람인 이성령(李星齡)의 『春坡堂日月錄』에 기재된, “우리 나라의 역관 한원(韓瑗) 사신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을 때” 원숭환을 만나, 누르하치가 이미 중상을 입었다는 말을 “원숭환으로부터 들었다.”[각주:1] 란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령이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고 한 역관이 전해들은 일을 다시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료를 통해 살펴보자. 영원전투가 있었던 것은 천계 6년(1626) 1월의 일이다. 누르하치가 원숭환의 대포에 맞아 죽었다면, 『淸史稿』 태조본기에 있는 누르하치가 4개월 뒤인 천계 6년(1626) 5월 칼카 부를 공격하여 칼카부의 버일러를 죽인 일[각주:2]은 과연 누가 한 것인가? 또한 중상을 당해 그 상처로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칠순의 노인이, 중상을 입었는에도 몽골 원정까지 따라갔다고 하는 건 매우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淸實錄』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죽음은 전투가 일어난 지 8개월 뒤인 천계 6년(1626) 8월의 일이다. 중상을 당했다던 고령의 노인이 중간에 몽골 원정에까지 참여하고 그러고도 8개월이나 살아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설마하니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죽음을 숨기고 8개월 동안 대역이라도 세웠단 말인가? 차라리 누르하치가 원숭환의 대포에 맞은 상처로 죽었다고 하기 보다는 노환으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2. 홍타이지를 격퇴한 것 북경성 전투


  숭정 2(1628)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는 영-(寧錦) 전선을 우회하여, 장성의 희봉구 일대를 돌파, 직접 북경을 공격하였다. 이 때 원숭환은 9천 군사를 이끌고 사졸들은 밥을 먹는 것도 거르고, 말은 꼴을 먹이는 일도 없이 급박하게 달려[각주:3] 북경으로 이동, 홍타이지의 10만 대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밥을 먹는 것도 잊고 부리나케 달려왔다던 원숭환이 대동총병(大同總兵) 만계(滿桂)의 군대보다 4일이나 늦게 도착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원숭환이 만계보다 먼 거리를 이동하였던 것도 아니다. 이 때 원숭환의 이동거리는 (剖肝錄, 余大成) 3백 리였지만, 만계는 1천여 리였기 때문이다. 원숭환이 만계보다 소식을 늦게 받았다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이것이 요동지역의 일인데 요동지역의 사령관이 서부전선의 사령관보다 소식을 늦게 알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는다.

 

  또한 원숭환은 광거문(廣渠門)에서, 만계는 덕승문(德勝門)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과연 청나라의 군대는 둘 중 어느 쪽이 주공이었을까? 淸史稿』 태종본기를 보자


홍타이지는 우익의 대 버일러 다이샨과 버일러 지르갈랑 등을 이끌고 護軍과 몽골병을 이끌고 만계 등을 공격하였다.”[각주:4]


그렇다면 원숭환이 대적한 청나라의 대장은 누구였을까? 멍구타이였다. 멍구타이가 홍타이지보다 대군을 이끌고 갔을 리가 없다. 더구나 원숭환의 군대는 겨우 9천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9천의 군대를 상대로 하면서 많은 병사를 내주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청실록에 동일한 기록을 확인해 보자


멍구타이는 대군을 이끌고 오지 않았고 다만 護軍과 몽골병 2천을 거느리고 영원순무(寧遠巡撫) 원숭환, 금주총병(錦州總兵) 조대수(祖大壽)의 병사 2만 군대가 주둔한 사와문(沙窩門)으로 갔다. 멍구타이가 병사를 3대로 나누어 각 어전으로 하여금 호군을 이끌고 전진하게 했다. 하오거가 홀로 군대를 이끌고 오른쪽으로 전진하여 적의 복병을 격퇴하였고 적을 죽여 성의 해자까지 쳐들어갔다. 남은 세 버일러는 오른쪽으로 따라가지 않고 중앙의 길로 쳐들어가 적병을 격퇴하였고 역시 성의 해자까지 전진하였다.”[각주:5]


이를 통해 보면 원숭환이 상대한 적은 홍타이지의 10만 군대가 아니라 멍구타이의 2천 군대였으며 그마저도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원숭환이 홍타이지의 대군으로부터 북경성을 구원했다는 말은 실로 믿을 수 없음이 아닐 수 없다. 원숭환은 기껏해야 조공이었을 뿐이며 그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북경성을 구원한 공은 홍타이지를 상대한 만계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3. 원숭환은 어떻게 하여 영웅이 되었을까.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원숭환이 역적의 지위에서 복원되어 영웅의 지위로 끌어올려진 것은 청 건륭제 시기의 일이다.[각주:6]

 지난번, 원숭환의 죽음과 그 이유라는 글에서 밝혔듯이, 당시 명대의 사람들은 원숭환의 죽음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또한 원숭환의 죽음이 청나라 홍타이지의 계략에 의해 숭정제가 여기에 속아넘어갔고, 그래서 원숭환을 죽였다는 주장도 청 건륭제 시기에 나타난 주장이다. 사실 동시대 명나라 사람들이 원숭환에 대해 가진 인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예를 들어 『쾌락의 혼돈』과 『룽산으로 가는 길』을 통해 유명인사가 된, 장대(張岱)의 기록을 보자. 


원숭환은 키가 작고 눈빛이 사나워 생김새가 마치 작은 원숭이와 같았으며 성격이 극히 흉폭하였다.”[각주:7] 


지금 우리가 백과사전에서 검색하면 볼 수 있는 오른쪽 원숭환의 초상은 뭐지? 이건 나중에 건륭제의 지시로 만들어진 그림이다. 대체 어떤 기이한 사정이 있길래, 원숭환이 죽은 뒤 100년이 지난 뒤에서야[각주:8] 홍타이지의 신묘한 계책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어떤 기이한 사연이 있길래 100년 뒤의 사람이 원숭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그의 초상을 제작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건륭제는 왜 초상을 다시 제작하도록 했을까. 왜 건륭제는 원숭환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청실록에서는 원숭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숭환은 계요독사(薊遼督師)가 되어 비록 우리 나라에게 어려움을 주었지만 맡은 바에 유능하고 충성을 다하였다. 하지만 당시 황제는 어지럽고 정치는 혼란스러워 결국 그 혼자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고 결국 자신이 목숨을 잃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袁崇煥督師薊遼雖與我朝爲難但尚能忠於所事彼時主暗政昏不能罄其忱悃以致身罹重辟深可憫惻)[각주:9]


이것이 원숭환에 대한 청나라의 공식적인 평가다. 


때문에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明史』에서는 명나라의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이에 이르러 황제가 원숭환을 오인하여 죽이고 말았다. 원숭환이 죽자, 국경을 지키는 일은 맡을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명의 멸망은 여기서 결정된 것이다. (至是帝誤殺崇煥自崇煥死邊事益無人明亡征決矣)[각주:10]

  

  즉, 원숭환의 죽음에서부터 이미 명나라의 멸망은 기정사실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원숭환은 “유능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으니 그를 오인하여 죽인 숭정제는 당연히 “어지러운” 황제가 될 수 밖에 없고, 당시 정치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결국 명나라의 멸망은 이미 “여기서 결정된 사실이 되므로, 명나라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지 결코 청나라가 멸망시킨 것이 아니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명나라는 이미 천명을 잃고 망해버렸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 새롭게 천명을 부여받고 청나라가 들어서게 되었을 뿐이며 이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실제 명나라의 멸망은 명나라 조정에 원한을 품은 농민 반란에 의한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청나라 조정의 이러한 논리가 농민들 및 신사들을 상대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작용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원숭환에 대한 평가는 명나라에 대한 평가로 직결되며, 이것은 다시 명나라의 유민에 대한 청나라의 정책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결국 청나라의 입장에서 명나라의 멸망은 청나라의 책임이 아닌 기정사실이 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서 원숭환은 명장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처음 원숭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 것은 순전히 숭정제를 방어하겠다는 유치한 심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원숭환을 죽인 것이 숭정제 최대의 실수라고 꼽히기 때문에 자연히 나는 원숭환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원숭환을 우상화하고자 결심한 사람들 - 양계초 등 - 의 심리와 정반대에서 출발하였을 뿐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과정이다. 어차피 원숭환은 청말 민국시기서구 열강의 침입의 위기에 직면하였던 상황에서 민족의 영웅을 창조함으로써명나라-중국청나라-서양원숭환-애국열사의 도식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고 했던 근대 시기의 만들어진 영웅이 아닌가? 명말청초의 혼란한 시기는, 객관적인 시각의 탐구를 어렵게 하고, 명대 출판업의 성황으로 나타난 다양한 필기, 문집, 잡기, 야사의 범람은 진실과 소문을 구분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위의 글은 또 하나의 순진한 접근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 문제가 다른 역사가의 성실한 접근이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위의 글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1. 李星齡, 『春坡堂日月錄』 [본문으로]
  2. 『淸史稿』, 「太祖本紀」 [본문으로]
  3. 閻崇年,『崇煥之死矌世奇寃』 [본문으로]
  4. 『淸史稿』, 「太宗本紀」 [본문으로]
  5. (淸)『太宗實錄』 사와문은 광거문의 별칭이다. [본문으로]
  6. 趙翼, 『廿二史札札記』 [본문으로]
  7. 張岱, 『石匱書後集』, 「袁崇煥列傳」 [본문으로]
  8. 모두가 알다시피 원숭환의 죽음은 1630년의 일이다. 그리고 건륭제의 즉위는 1736년의 일이다. 또한 이 때 明史가 완성되었으며, 숭정제가 홍타이지의 계략에 넘어가 원숭환을 오살하였다는 기록이 추가되었다. [본문으로]
  9. (淸)『高宗實錄』 [본문으로]
  10. 『明史』, 「袁崇煥傳」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