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瀟湘館/서안(2013)

C'est la vie

by Mr. Trollope 2013. 6. 8.


요즘 서안은 정말 덥다. 일기예보를 보니까 서울 날씨도 만만찮을 것 같긴 하지만. 진짜 덥다. 게다가 교실의 에어컨이 고장난 상태라 (이번 학기 내에 수리할 계획은 없댄다) 어제는 어쩔 수 없이 부채를 사러 나갔다 왔다. 부채 1개에 10원짜리. 가격흥정으로 시간낭비하는걸 싫어하는 관계로 인터넷으로 미리 가격을 알아보고 출발했다.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한바퀴 삥 돌아다니면서 한번 가격을 물어보고 커트라인을 넘으면 땡 비슷하게 부르면 콜 이런 식으로 했는데 느낌상 그리고 인터넷 가격표상 흥정하면 5원 정도는 더 낮아질 것 같긴 했지만. 날씨도 덥고 귀찮아서 그냥 10원을 내고 받아왔다.


오랫만에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오면서 새삼 든 생각. 과거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몇년간 자전거를 타봤지만, 자전거가 이렇게 델리케이트한 물건이었으리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자전거를 탔던 그 몇년 동안, 브레이크에 사용되는 고무가 닳아서 브레이크가 잘 먹히지 않았던 거랑, 브레이크가 잘 안먹어서 내리막 길에 바위를 들이받았고 그래서 바퀴가 S자로 휘어버렸던 것을 제외하면 딱히 어딘가 고장이 났던 기억은 없는데. 여기에 와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갖은 고장이 튀어나온다. 핸들, 바퀴, 체인 덮개, 안장 등등. 자전거를 타고 바깥에 나갈 때마다 어딘가 한군데씩은 꼭 고장이 나는데 이번에는 손잡이였다. 자전거가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하고 감수성 돋는 물건이었단 말인가. 지금껏 고장나지 않은 한군데는 체인 뿐이었는데, 다른 곳은 고장이 나더라도 억지로 끌고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여긴 정말 치명적이다. 사실 만약 체인이 끊어졌으면 난 그냥 길에다가 자전거를 팽개치고 버스를 탔을 꺼다.


아무튼 그렇게 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뇌속이 익어버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는데, 말했다시피, 교실에는 에어컨이 안되고 또 방안에도 에어컨이 없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늘 도서관을 가는데, 당연히, 사람으로 꽉꽉 들어차서 자리를 구하기 힘들다. 노트북 배터리가 떨어질 때까지 앉아 있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온다. 그래도 아직 덥다. 오늘은 블로그에다가 뭘 좀 써야지 하고 생각을 하다가도 찜통같은 방안에 들어와 앉는 순간 모든 정신이 달아난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시작한 프로젝트로 돈황학 프로젝트가 있는데 느낌상 그만뒀을 법도 한데 어쨌든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 같다. 여름방학이면 결과보고를 해야 하는데 지난 한학기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놀기만 했던 터라. 어찌어찌해서든 뭔가 결과를 갖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요즘은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물론 품질은 개판. 송산의 가을이여 오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초벌이라도 해놓고 나중에 수정해야지. 송산.. 아니 돈황학 작업을 제외하면 논문 작업을 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써야지. 돈황학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져서 지금은 거의 진척이 없다. 그래도 일단은 계속 붙잡고 있다.   


저녁에는 산책을 한다. 여기는 길이 곧고 반듯해서 산책하기 딱 좋다. 더구나 가로수가 아치형으로 드리우고 있기 때문에 햇볕도 적당히 가려준다. 하지만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은, 이 나무는, 바람이 불때마다 뭐가 우수수수 떨어지는데 이게 뭔가 싶다. 나무 이름을 모르니 이게 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덕분에 콧속이 마를 날이 없다. 저녁에는 선선하기 때문에 굳이 바람이 불어줄 필요도 없어 산책을 할때마다 바람아 불지 마라 하고 기도를 한다. 기숙사를 출발해서 학교 전체를 한바퀴 돌면 대충 30분 정도가 걸린다.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걷다 보면 놀러 나온 인근 주민들을 많이, 아니 바글바글하게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오늘은 오랫만에 비가 왔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빗소리를 들을 수 있다. 덕분에 뇌주름이 조금은 돌아온 것 같아서 이렇게 블로그에다가 뭘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서 자주 어울리는 사람은 중국인들이 아니다. 중국애들을 만나러 중국에 왔는데 외국인과 노는 이 어이없는 상황. 학부 수업을 들으면 모를까 내가 만날 수 있는 중국인은 선생님밖에 없다. 함께 노는 아이들은 베트남, 프랑스, 일본 애들인데 신기하게도 전부 유색인종이다. 맨유 스쿼드를 보면 데헤아-치차리토와 같은 유색인종 그룹과 (과거엔 박지성도 이 그룹이었다) 루니-클레벌리-캐릭과 같은 백인 그룹이 나뉘어져 노는 모습이 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게 될줄은 몰랐다. 일본 애들이 나한테 별명을 지어줬는데, 사사키 코이치라고 부른다. 사사키는 그냥 아무 성을 가져온 것이고 코이치는 내 이름 마지막을 일본식으로 바꾼거다. 창씨개명 같아서 꺼림직하긴 하지만 그냥 유쾌하게 넘겨 버리려고 한다. 한중일은 한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일본식 이름이 생길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 이런게 인생이지.


여기에서의 생활도 이제 몇 주 남지 않았다. 내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6월 말이면 이곳을 떠난다. 자료 조사를 위해서 다시 중국에 와야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몹시. 안암동의 술집이 그립다. 그리고 짜장면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