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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왕푸징(王府井) : 명대 북경 10왕부의 역사

by Mr. Trollope 2013. 11. 16.



북경의 유명한 거리, 왕푸징(王府井)은 우리나라 서울의 명동쯤에 해당하는 쇼핑 타운으로 이곳에는 동양 최대의 쇼핑몰인 동방신천지를 비롯하여 수많은 백화점이 밀집해 있다. 비록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원대 이전까지 이곳은 단순히 조그마한 촌락에 불과했고 원대에는 정자가(丁字街)란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특별한 의미는 없다. 이 이름은 단순히 갑을병정 순으로 붙인 것으로, 고대 도시에서 지명은 절이나 관청, 학교, 탑의 이름을 따서 짓던가 하다못해 근처에 있는 다리 같은 건축물의 이름을 따서라도 이름을 지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이곳이 별 의미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이곳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명대이다. 명 초 영락제에 의해 자금성이 조성되고 그 옆, 바로 이곳에 10왕부가 건설된 것이다. 그 뒤 이 곳은 10왕부가(十王府)란 이름이 붙여졌고 '왕부의 우물'이라는 뜻의 왕푸징(王府井)이란 이름이 생겼다. 하지만 현재 왕푸징이 유명한 것에 비해 10왕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지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적다. 


아래의 글은 바이두에서 우연히 웹서핑을 하던 중에 찾은 것으로 명대에 건설된 소위 10왕부란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었는가를 다루고 있다. 

 



明京師十王邸考

李寶臣(北京社會科學院歷史所究員), 北京文博, 2004.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는 과정은 다음의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첫번째 단계는 영락 원년(1403) 정월부터 영락 4(1406) 7월까지로 황제가 예부상서(禮部) 이지강(李至剛)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평(北平) 수도(京都)의 지위로 승격하고 북경(北京)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북경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북경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였다는 것과 수도만이 가질 수 있는 기구가 설치되게 되었다두번째 단계는 영락 4 7월부터 영락 14(1416) 8월까지로황제의 명령에 의해 북경에 궁전을 조성하기 위한 물자가 각지에서 징발되었고 운하 주변의 지역에서는 궁전 조성에 필요한 기와와 벽돌을 준비하도록 하였다이 단계에서는 주로 북경의 궁전 건설에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3번째 단계는 영락 14(1416) 8월부터 영락 18(1420) 12월까지로 황제는 정식으로 명령을 내려 북경에 궁전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4년간의 공사를 거쳐 마침내 서궁(西宮) 1,630 ()을 비롯하여 여러 궁궐 그리고 태묘, 천단 등(廟社, 郊祀, , , 宮殿, 門闕, 皇太孫宮) 10왕부(十王邸) 건축물을 모두 8,350 ()을 건설하였다. 이 모두를 합해 총 9,980 ()이었다이른바 ‘서궁(西宮)’이라는 것은 본래 연왕부(燕王府)였던 것을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이 단계에서의 공사가 모두 마무리되자 마침내 영락 19(1421) 정월 정식으로 천도를 발표하였고 북경은 수도 즉 경사(京師)가 되었다.


영락제의 북경의 건설 과정에 4년여의 시간을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수의 건물(房屋)을 건설하였는가는 상세히 고증할 필요가 있다여기에서 명태종실록(明太宗實錄)에서 기록된 영락 18(1420) 12 계해(癸亥“건물은 모두 8,350 간이다”라는 기사를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이 숫자는 서궁(西宮이외 건축물의 방실(房屋)의 총 수를 기록한 것으로 즉 10왕부(十王邸)”를 가리키는 것이다. 청말 이후 보통 왕푸징(王府井) 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이 기록을 인용하여, 10왕부”의 규모는 모두 8,350간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이 문장을 살펴보면 말이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적지 않은 의문이 발견된다원 사료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처음 북경에 궁전을 만들 때 사묘 등(廟社, 郊祀, 壇場, 宮殿, 門闕) 규격(規制)은 모두 남경(南京)의 것을 따랐으나그것의 웅장함과 미려함은 남경의 궁전을 뛰어 넘는다다시 황성(皇城)의 동남쪽에 황태손궁(皇太孫宮)을 건설하고 동안문(東安門밖 동남쪽에 10왕부(十王邸)를 건설하였다모두 합해 8,350간이다. (初,營建北京,凡廟社、郊祀、壇場、宮殿、門闕規制,悉如南京,而高敞壯麗過之;複於皇城東南建皇太孫宮,東安門外東南建十王邸。通爲屋八千三百五十楹。)[1]

 

여기에서 표점을 어떻게 찍는가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먼저 인용된 본문에 찍은 표점의 방식을 따르면 8,350간은 북경의 조영 공사를 통해 만들어진 건물(房屋)의 총 숫자와 같다두 번째는 “高敞壯麗過之”의 구절 뒤에 마침표를 찍고 “建十王邸”의 구절 뒤에 쉼표를 붙이는 것으로 이렇게 읽으면 8,350간은 곧 황태손궁과 10왕부 건물을 합한 숫자가 된다. 세 번째 방식은 기본적으로 2개의 방식을 따르고 다시 “皇太孫宮”의 구절 뒤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 8,350간은 오로지 10왕부 건물의 숫자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여기에서 3번째 방식이 가장 유명하다보통 본문을 인용할 때는 종종 “複於” 이 두 글자를 무시해서 즉 “東安門外東南建十王邸,通爲屋八千三 百五十楹。”으로 읽곤 한다이것이 계속해서 전해지고 내려오면서 마침내 정론이 되어 그대로 굳어지게 되었다.


3가지의 표점 방식을 살펴본다면 3가지 방식 모두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에 3가지가 모두 사실이 될 수는 없다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울까 또는 사료의 진짜 의미에 가까운 것일까여기에서는 본문을 해독하는 것에서 벗어나 역사적 시야를 넓혀 명조의 정치문화 제도를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위에서 살펴본 2, 3번째 표점방식은 사실 똑같다고 묶을 수 있기 때문에 핵심은 “十王邸”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十王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규모와 기능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차례로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十王邸”는 사실 10개의 왕부를 가리키는 것도, 10왕의 왕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十王”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래의 5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째, “十王邸”는 종종 10개의 왕부를 의미하거나 혹은 10왕의 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곤 한다두 가지를 비교하면 전자가 훨씬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기록을 통해 살펴 보자면 영락 연간에 북경에 궁전을 건설할 때 영락제에게는 태조가 남긴 15명의 왕이 있었고 그 외에 영락제 자신의 아들인 한왕(漢王) 조왕(趙王)이 있었다만약 수도에 10개의 왕부를 건설하려고 한다면 이 17명의 친왕을 어떻게 10개의 왕부에 배치해야 할지 그리고 어느 10명만을 북경에 배치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다른 사료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없다이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만약 10이라는 숫자가 10개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0번째 왕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서열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살펴보자. 태조의 26명의 아들 중에서 영락제는 넷째이다영락제에게는 분명 아들이 2명밖에 없기 때문에 10왕부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만든 것이 될 수가 없다태조의 아들은 그 수가 10명을 넘는다. 그의 10번째 아들은 노왕(魯王) ()으로 홍무 3(1370)에 태어나 2개월 만에 왕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18세에 연주(兗州)에 취번하였지만 홍무 22(1389)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이다.[2] 이 때 ()의 아들 조휘(肇煇)의 나이가 아직 어렸으므로 영락 3(1405)이 되어서야 왕위를 승계하였다때문에 이미 사망한 왕자를 위해 영락제가 수도에 왕부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없다따라서 10왕부가 뭔지 생각할 때 사람들은 종종 이것이 10개의 왕부다 라는 생각이다만약 8,350간을 10왕부 건물의 총수라고 생각한다면 단순 계산으로 하나의 왕부가 평균적으로 835간을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 왕부 건물의 규격에 따르면 796간이므로 이것은 제도에 맞는다또한 여기에 황태손궁을 합해 11개의 건축군이라고 생각해도 평균 759간이 되기 때문에 이 역시 제도에 부합한다때문에 사람들은 대개 의심하지 않고 10왕부가 곧 10개의 왕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어왔다하지만 이러한 생각에는 앞서 살펴본 역사적 정황을 통해 살펴보았을 때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둘째, 10왕부가 만약 10번째 왕의 왕부를 고쳐 만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명대 황자의 분봉제도와 종실제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명 태조가 명을 건국한 이후 여러 왕자를 번왕에 분봉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유약하거나 병든 경우를 제외하면 26명의 왕자를 모두 번왕으로 분봉하였다영락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이 방법은 이어져서 태조의 어린 아들을 포함하여 영락 6(1408)에는 전부 취번하였다홍무 24(1391) 태조의 21 () 노주(潞州)에 봉해졌다. 22자 영() 평양(平涼)에 봉해졌다. 23 () 남양(南陽)에 봉해졌다. 24 () 안륙(安陸)에 봉해졌다. 25 이왕(伊王) 낙양(洛陽)에 봉해졌다이로써 영락제가 여러 왕자들을 수도에 남겨두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영락제는 모두 4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황태자이기 때문에 취번하지 않고 4자는 일찍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번왕이 되는 아들은 모두 2명이다. 2 고후(高煦)는 영락 2(1404) 한왕(漢王)으로 봉하여 운남(雲南)을 봉국으로 하였으나 거리가 멀다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결국 금릉(金陵=남경)에 남겨두었다가 영락 13(1415) 5 청주(靑州)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다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영락 15(1417) 3 낙안주(樂安州)에 취번하도록 했고 이번에는 거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3 고수(高燧)는 영락 2(1404) 조왕(趙王)으로 봉하였으나 한왕(漢王) 고후(高煦)와 결탁하여 태자의 자리를 넘보다가 실패하여 경사에 감금되었다국자사업(國子司業) 조형도(趙亨道), 동자장(董子莊) 장사(長史)로 임명하여 그를 감시하게끔 했고 홍희 원년(1424)이 되어서야 팽덕(彰德)에 봉해졌다이를 보면 영락제가 북경에 궁전을 건설하도록 명령하였을 때 왕자 중에서 조왕(趙王) 고수(高燧한 사람만 경사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마저도 감시받고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취번하였던 것이다금릉 안에는 왕부 건물이 거의 없으므로 북경에도 따로 왕부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당시 조정이 재정이 부족하였던 데다가 공사의 비용이 엄청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막대한 재력인력물력을 낭비하여 아무런 이익도 없이 왕부를 건설할 이유가 없다때문에 수도에 정식으로 왕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분봉제도가 바뀌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왕부를 건설하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없는 낭비가 될 것이다.


셋째, 10왕부가 만약 정식의 10개 왕부를 가리키는 것이라면과연 성 안에 이걸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홍무 4(1371) 왕부의 건설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건 영락 연간에 이르기까지도 바뀌지 않았다따라서 만약 북경에 정식으로 왕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면 당연히 이 규정에 따라 건설되었을 것이다그 규정은 이렇다


왕부의 담장은 동서로 150.025(), 남북으로 197.025(), 방의 수는 796()이어야 한다왕부의 바깥은 벽돌로 쌓은 담장으로 두르고 둘레는 1,089()이다


수도에 왕부를 건설했다면 왕부 주위의 담장은 따로 지을 필요가 없이 그냥 황궁의 담장을 사용하였을 것이며그래야 도시 안에 그만큼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건물을 짓는 부담을 피할 수 있다만약 이러한 규모의 왕부가 10개나 왕부정 거리(王府井大街)의 한쪽에 일렬로 건설되었다고 한다면 단순한 계산으로도 이 건물들의 전체 길이는 성 북쪽의 안정문에까지 닿게 되었을 것이다또 가로 1(), 세로 10() 가량의 면적 안에 10개의 왕부가 몰려 세워진다면 분명 거리 전체를 메웠을 것이다. 당연히 왕부와 왕부 사이에 간격을 두고 배치하는 것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1리는 북경의 일반 일반적인 골목(胡同)의 평균 너비다만약 10왕부가 왕부정 거리(王府井大街)의 양쪽에 배치되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평안대가에서 북병마사가 있는 골목 근처까지 이어졌을 것이다그렇다면 이처럼 웅장한 건축군들이 “東安門外東南” 지역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에 문제가 생긴다만약 동안문 밖 동남쪽에 10왕부를 건설하였다는 내용을 굳이 문자 그대로 좁게 해석한다면 북경성 내성의 동남쪽에 10왕부가 건설되었다는 뜻이고 따라서 그 규모는 자금성 하나를 더 짓는 규모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이 지역에는 그냥 왕부정 거리(王府井大街)만 있을 뿐이지 다른 사료에 등장할 만한 큼직한 뭔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를 통해 10왕부의 규모가 8천여 ()에 이르렀다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10왕부가 만약 정식의 10개의 왕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를 만들기 위한 그만한 공사 기간과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황제의 자녀를 위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걸 대충 만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준비기간도 길었을 것이고여기에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는 기간 역시 훨씬 길었을 것이다또한 일단 공사가 시작되었다가도 계획한 시간이나 예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준비가 요구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영락제가 북경에 궁전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물자를 준비하고 배치하는데 모두 14년이 걸렸다. 14년 동안에 마련된 물자가 곧 북경에 건설해야 하는 건물의 규모와 규격을 결정한다정식으로 공사가 시작된 이후 조정에서는 13포정사에서 각지의 장인을 뽑아 돌아가며 북경으로 올려보냈으며공사에 필요한 다른 작업을 위해 따로 동원한 공장과 인부 등의 인원이 10만을 넘었다.[3] 하지만 동원하는 인원은 무제한으로 늘릴 수가 없으며 동시에 동원하는 인원 수 역시 한계가 있다. 만약 과도하게 징용할 경우에는 도리어 공사의 진행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공사에 투입되는 인력이 최적화된 비율을 넘어서게 되면 오히려 그 산출이 기대한 것처럼 정비례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업의 능률을 방해하거나 오작동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동원된 인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만약 8,350()이 정말 10왕부 또는 황태손궁의 크기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공사에 필요한 작업량은 훨씬 늘어나서혹은 몇 배까지 증가하였을 수도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설령 물자가 충분했다고 하더라도 공사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4년여의 시간으로는 이만한 규모의 공사를 치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실제 《明太宗實錄》의 기록을 통해 북경의 공사 속도를, 공사의 날짜를 통해 작업량을 추측해볼 수 있다영락 14(1416) 8 丁亥일(28), 북경의 “西宮”의 공사가 정식으로 시작된 이후 다음 해 4 癸未일(27)에 완공하였는데모두 8개월이 소요되었다. 여기에서 모두 1,630 ()이 만들어졌으니까 평균적으로 1개월에 204()을 만든 셈이다서궁이 완성된 이후 공사의 두 번째 단계는 2개월 뒤에 시작하였는데영락 15(1417) 6월에서 영락 18(1420) 12월까지 3년 반이 걸렸다영락 15년에는 윤5월이 있어 때문에 실제 이 공사는 6월에 시작한 것이고 때문에 계산에 넣어야 한다영락 18(1420)에도 윤정월이 있기 때문에 3년 반은 대략 43개월이다평균적으로 1개월에 204()을 만든다고 계산하면 43개월에 8,772()이며이는 8,350()을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과 비슷하여 실록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하지만 고대의 건축 공사는 자연적인 조건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북경은 4계절이 분명하여 공사가 몰리는 시기는 매년 봄과 가을에 집중된다겨울에는 기온이 하강하여 누석과 벽돌의 제작 과정이 어렵고 여름에는 기온이 높고 비가 많아 목공에 적합하지가 않다이를 바탕으로 추측하자면 8,350()을 완성하는데 소요된 공사는공사의 두 번째 단계에 소요된 공사 기간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10왕부의 건설 공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10왕부는 그 일부분에 불과했다


다섯 번째, 10왕부가 정식의 10개 왕부를 가리키는 것이라면이 왕부에는 당연히 왕부의 주인 10명이 있었을 것이다. 10왕부에 거처한 왕공의 임명과 이동과정은 분명히 문서의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고 이 기록은 마땅히 정사의 《諸王表》과《諸王傳》에도 실렸을 것이다이것은 역대의 왕조에서 반드시 기록되어야 하는 통상적인 사무임에도 불구하고 공식 기록에서는 이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한발 물러나서이러한 왕부가 만들어진 이후 조정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이를 위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관리를 뽑아서 왕부에 배치하거나 하는 등의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또한 이처럼 거대하고 규모가 큰 건물에 설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이것을 그냥 내버려지게 두거나 혹은 훼손되는 것을 그냥 지켜봤을 리가 없다하지만 명대 북경의 관청 기록 혹은 개인에 의해 쓰여진 기록을 뒤졌을 때 이 10왕부의 역사와 변화 과정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도시의 유적이 어떻게 남는지를 생각해볼 때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이라면 어떤 사정이 있든지 간에 어떤 형식으로든 그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파괴된 기록이라던가 다른 용도로 전용이 되었다던가 하는 등의 기록이 남아야 한다그리고 그 중 일부라도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청말이 될 때까지 5백년 동안 북경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이렇듯 국가에서 건설한 웅장한 건축물이라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글 남기기 좋아하는 문인들이 이러한 건축물의 변천과 역사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현실에서 이렇게 8천여 ()에 달하는 웅장한 건축물이그것도 격조 높은 기준에 맞추어 지어진 통일된 건축물이라면 분명 후대에 도시의 거리나 공간 상에 어떠한 형태로든 그 윤곽이나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청대의 기록에서 조차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락제 이후 이 건축물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따라서 10왕부는 규모가 크지 않은 단순히 하나의 건축물에 불과하며 그 규모도 당시 사람들이 특별히 주의를 가질만한 그러한 크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그래야만 오늘날 사람들이 관련된 기록을 찾아내기 힘들다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종합하자면 10왕부는 존재하였지만 결코 10 왕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8천여 간(間)에 이르는 대형 건축물도 아니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10왕부는 아마 번왕이 수도에 올라왔을 때 묵는 숙소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숙소로서의 성격이어야만 10왕부의 규모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 이 건축물은 영락 연간에 진행되었던 조영 공사의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였을 뿐이고 절대 공사의 중요 부분이 아니었다. 북경의 건설 공사 에서 10왕부가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하고, 명대의 건축 기술, 역량 및 효율 등의 문제 등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본문에 표점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하는 고민 중에서 첫번째 방식을 취하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즉 8,350간(間)의 숫자는 영락 연간에 북경 건설 공사에서 소요된 건축물의 총합을 가리키는 것이다. 문장 속에 있는 “初……”, “複於……”, “通爲……” 등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부딪쳤던 옛 사람이 고민한 끝에 넣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검토한 바에 따라 10왕부는 하나의 건축물이며 그것이 10개의 왕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예를 보자. 가정 29년의 경술지변(庚戌之變, 1550)알탄칸이 북경으로 접근하였을 때 계엄이 내려진 적이 있었다.

 

“그 때 경성에 여러 흉악한 도적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말을 하길 ‘내외 문무 대관들이 금은 수백만을 쌓아두고 있는데 적이 이미 성 근처까지 왔으니 우리들이 불을 질러 대신들의 집을 약탈하자’고 하였다대신들이 모두 놀라 말을 하길 성 밖에는 변방의 군대가 있으니 이를 믿으면 되니 마땅히 경성의 군대는 안으로 들여 황성을 수비하고 조정을 안정시키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이에 왕방서(王邦瑞, 당시 이부시랑 겸 성수군무제독(吏部侍提督城守軍務)이었다) 9문에 각각 병사 9천명을 증원하여 순라 관군으로 하여금 동서 장안가(長安街) ()을 세울 것을 제안하였다상대절(商大節, 당시 첨도어사 겸 순성어사(僉都禦史負責提督巡城)이다) 9문의 병사 9천명을 증원할 것을 제안하였다() 상서(, 당시 병부상서인 정여기(丁汝夔)를 말한다) 10왕부(十王府), 경수사(慶壽寺)에 각각 병영을 건설하여 병사 3천명을 주둔시킬 것을 제안하였다.[4]

 

이를 통해서 10왕부는 10개의 건축물 집단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건축물이며 당시 10왕부 안에는 어떠한 왕공도 살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동서 장안가에 영을 세우고 황성을 수비하도록 했다면 수비군은 분명 황성 부근의 요처에 자리를 잡아야 했을 것이다그런데 경수사(慶壽寺) 10왕부(十王府)가 마침 장안가의 동서쪽 즉 황성의 양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경수사는 대략 현재의 전보빌딩(電報大樓부근이다. 10왕부는 여기에 대칭하여 위치해 있었을 것이므로 대략 현재의 북경호텔(北京飯店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장안좌문(長安左門)을 나서서 동쪽으로 가면 옥하교(玉河橋)을 지나 10왕부의 서쪽까지 이어진 좁은 길 가운데 남북으로 뻗은 문이 있는데 이를 동안문(東安門)이라고 한다.[5] 

 

이는 명말의 태감(太監)이 황성의 각문의 방위를 기록한 것으로서오늘날 10왕부의 위치를 고증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10왕부의 위치는 중성(中城) 등청방() 안이며중성의 범위는 “정양문 안에 있으며 왕성의 양쪽이다. 그 동쪽의 남쪽 끝은 남훈방(南薰坊)으로 ()의 범위는 “정양문 내성벽을 따라 동쪽으로는 숭문문 거리(崇文門大街)까지북으로는 장안대가(長安大街)까지이다. 길의 북쪽 끝은 당연히 등청방() 될 것이다이 방의 배치는 순서대로 “서쪽부터 단패루(單牌樓), 10왕부(十王府), 감수정(水井)제왕관(諸王館), 두조골목(頭條胡同), 채창(菜廠등”[6] 의 지명을 갖고 있다거리의 규모와 교차점은 건물의 규모를 반영한다그 중 주목해야 할 점은 감수정(水井) 채창(菜廠)이라는 두 지명으로서 지금의 왕푸징 거리(王府井大街)의 서쪽에 있는 대소감수정(大小水井) 채창골목(菜廠胡同)이다방 사이의 경계선은 반드시 길을 따라 수직으로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방이 굳이 정방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특히 오늘날 고대의 도시를 복원하여 지도를 제작할 때 골목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오늘날의 모양만을 갖고 고대 도시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10왕부가 완성된 이후 그 부근의 지역은 지금도 보통 주거지역이다천순 7(1463) 7, “동안문 밖 이남의 관군 100 () 무공방(武功坊)의 서쪽으로 옮겼는데그들이 왕부(王府)에 가까웠던 까닭이다.[7] 이것은 10왕부가 만들어진 지 43년이 지난 일로여기에서 이주시킨 사람들은 군호(軍戶)일 뿐으로 여기에 민간인은 포함되지 않는다이것은 10왕부의 규모에 한계가 있었음을 증명해준다무공방(武功坊) 《五城坊巷胡同集》 등의 사적의 기록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데 아마 대시옹방(大時雍坊)에 속해 있던 것 같다.[8]


10왕부가 하나의 건물이라면 어째서 “十王”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일까 이는 당시 황자를 번왕에 봉하는 예의와 관련이 있다역사상의 용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후세에 갔을 때 그 진짜 함의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글자의 뜻만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10왕부(十王府)를 모두 8,350()의 규모를 가진 건축군으로 이해하고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하지만 명칭이란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 오해는 풀릴 수 있다영락제 이후에 “황자를 번왕에 봉할 때황후()의 아들은 그 의제를 상십왕례(上十王禮)에 따르고()의 아들은 중십왕례(中十王禮)에 따르며()의 아들은 하십왕례(下十王禮)에 따른다.”고 하였다.[9] 여기에서 “十王”이라는 것은 번국으로 분봉(分封)을 받는 왕자(王爺)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이 십왕례(十王禮)의 예의에 따라 번왕(藩王)의 대우를 받게 됨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이를 통해서 추정을 해 보자면 10왕부는 ()의 작()으로 봉해진 이들이 수도로 올라와 조근(朝覲)하는 경우 거주하였던 숙소였을 것이다. 즉 종실왕공이 수도에 머물 때 잠시 머물렀던 곳이었던 것이다.


명대에는 번왕으로 일단 봉해지면 수도로 올라오는 것에 엄격하게 제한을 받았다홍무 6 (1373)년에 “친왕() 매해 조근()여럿이 한꺼번에 오는 것을 금지한다한번에 한명씩 찾아보며돌아간 뒤 아무런 우려가 없으면 다른 왕에게 알려 그제서야 내조할 것을 허락한다여러 왕은 날짜에 얽매이지 않고 나이가 어리건 많건적자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서자가 오며또한 나이가 많은 이가 먼저 오고, 나이가 적은 이가 나중에 온다순서를 다 돌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그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된다.[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각지에 분봉된 이후 제왕들은 수도에 올라와서 머무를 수 있는 권리를 박탈되었다는 것이다 10왕부는 각지의 제왕이 돌아가면서 수도에 올라왔을 때 잠시 머무르게 되는 숙소의 개념이며 동시에 여러 명의 왕들이 이곳에 머무르는 일이 발생할 수는 없다실제로 조근()이란 것은 봉국의 제왕들에게는 심각한 부담이 되는 행사였다수도에 올라갈 때면 자신이 직접 선물을 준비해야 하고하인이나 호위군사 등 뿐만 아니라 교통비와 경비 모두 일체 자신이 부담해야 했다때문에 제왕들이 수도에 올라올 때 그 행색은 사치스러울 수가 없었고수도에 머무르는 기간 내에도 역시 봉지에 있을 때처럼 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10왕부(十王邸)가 만약 제왕이 조근() 때에 머무르는 숙소라면마땅히 그 건축물 역시 화려하게 지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제왕이 수도에 올라오는 제도를 운용하는 제도가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지는 못했다북경천도를 위한 공사가 한창이던 시기에영락제는 황궁의 바로 옆에 지어지게 되는 10왕부(十王邸)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썼다그는 이것을 통해 자신이 불법적인 수단으로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이미지를 쇄신하고 친근하고 인자한(親親仁義)한 모습을 얻으려고 하였다. “영락연간에친왕(親王) 조근(朝覲)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대개 영락제는 건문제가 종실을 배척하였던 정책을 고쳐 (종실에게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다.[11] 그러나 영락제라면 종실을 우대할만한 특별한 정치적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꼭 후대의 황제에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었다즉 건문제가 종실을 배척하였던 정책이 많은 종실왕공의 불만을 가져왔기 때문에 영락제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종실왕공을 대상으로 많은 은사를 베품으로써영락제는 건문제를 대신하여 황제가 되는 것을 인정받고자 했던 것 뿐이다황제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황제는 번왕이 수도를 방문하는 행위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번왕이 자주 수도에 찾아오게 되는 것은 모반의 위험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어떤 번왕이 언제까지고 유유자적한 생활에 만족하고 지내기만 할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두는 것이었다때문에 영락제 사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친왕이 수도를 방문하게 되는 행위는 줄어들게 되었다선덕제 초기에 “한왕(漢王주고후(朱高煦)가 모반을 꾀하였기 때문에 주살하였고결국 번왕이 수도로 입조하도록 하는 규칙을 없앴다.[12] 정책이 바뀌게 되자, 10왕부(十王邸)는 과거의 목적을 잃어버렸다때문에 영락제의 북경 천도와 함께 잠깐 역사서에 등장하였던 10왕부(十王邸)는 그 이후에는 사적에 등장하는 경우가 없어지게 되었고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10왕부(十王邸)는 번왕이 수도에 방문하였을 때 머무르는 숙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도계속하여 “十王邸”라는 이름을 명말까지 유지하였다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함의하는데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곳이 제왕이 봉지로 떠나기 전에 머무르는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그렇다면 이것은 앞서의 기능과 비슷한 성질의 것이며 번왕의 분봉이라는 비슷한 종류의 일이다. “황제의 적장자는 태자의 위에 오르고나머지 황자들은 왕작(王爵)에 봉해지게 되는데, 15세가 되면 먼저 결혼을 한 뒤 집을 나서 경저(京邸)에 머무르고 성장한 뒤 봉국으로 떠난다.[13] 여기에서 황자의 ‘봉왕(封王), ‘결혼(結婚), ‘부임(之國) 3개의 단계에 걸쳐 진행됨을 알 수 있다결혼 전에는 모두 궁중에서 머무르다가결혼 한 이후에는 궁궐을 떠나 수도 안에 있는 거처로 옮겼다가 이후에 봉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얼마나 오랜 기간을 머무르게 되는가는 봉국에 왕부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기간 혹은 그 외의 여러 준비를 끝내는 기간에 따라 결정된다. 10왕부(十王邸)는 바로 그 중간 단계에서 결혼한 제왕이 “집을 나서 경저(京邸)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지내던 숙소였던 것이다.

 

  10왕부(十王邸) 제왕관(諸王館)은 근접한 위치에 있는데이는 《京師五城坊巷胡同集》의 기재에서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두 건축물의 기능은 무척 비슷하다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조정에서 제왕관(諸王館)을 사용한 기록은 10왕부보다도 훨씬 더 오래 되어서궁정(宮廷)에서 숙녀(淑女), 부마(駙馬)를 선발할 때 그리고 황자의 결혼식이 모두 여기에서 거행되었으며 때로는 종실에서 반란을 일으킨 황족을 구금하는데 이곳을 사용하였다예를 들면만력 47(1619), 4만력제의 6번째 아들 혜왕(惠王) 상윤(常潤)이 결혼하였을 때에 관한 기록을 보면 “혜왕(惠王) () 제왕관(諸王館)으로 옮겨 오면서오성병마사(五城兵馬司) 화부(火夫) 50명을 사용하여 청소하였고순라순포 관군 20명이 주야로 순찰을 돌았다.[14] 이를 통해서왕부정 거리(王府井大街)의 이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10왕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제왕관(諸王館)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10왕부(十王邸)의 문제를 고증함으로써,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8,350()의 건축물은 영락 연간에 북경 건설 공사 기간 동안 완성한 건축물의 총 규모를 반영하는 것이다결코 10왕부(十王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 《明成祖實錄》영락 18, 12 癸亥

[2] 《明史》卷116,《諸王傳》

[3] 《明會典》卷189《工匠》2

[4] 鄭曉, 《今言》卷4

[5] 呂毖輯《明宮史》전집,《宮殿規制》,北京古籍出版社,1980.

[6] 張爵, 《京師五城坊巷胡同集》中城,北京古籍出版社,1982.

[7] 英宗實錄》卷255.

[8] 孝宗實錄》卷212

[9] 鄭曉《今言》卷4

[10] 《明會典》卷56,《王國禮》2

[11] 沈德符, 《萬曆野獲編》卷4,上冊 106.

[12] 沈德符, 《萬曆野獲編》卷4,上冊 106. 일은 영락제 사후 겨우 2 뒤의 일이다.

[13] 《明會典》卷56,《王國禮》2

[14] 神宗實錄》卷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