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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명나라와 원나라의 전쟁 1368-1388 (4) 원의 멸망 이후. 요동전역

by Mr. Trollope 2013. 11. 14.



1368년 7월 28일 원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는 북진하는 명의 군대를 저지하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도(북경)를 출발, 상도로 피신했다. 이로써 원이 멸망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몽골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이 여전히 강력한 대원제국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였고 중원에서 물러난 것은 잠시 제국의 일부를 빼앗긴 것에 불과하며 자신들이 곧 되찾을 것을 공언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원이 멸망한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고려에서도 이 이후의 몽골을 북원이라고 불렀는데 1369년 8월이 되면 북원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고려가 북원이라고 부른 것은 상도에 위치한 토곤 테무르가 중원지배를 상실하였고 그들을 정통성이 결여한 정권으로 인식하였다는 뜻이다. 명에서는 그들을 고원故元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영락제 시기부터는 달단으로 표기한다. 



(1) 1368-1372 명의 북진과 몽골의 반격


상도로 도망친 토곤 테무르는 에센부카의 도움으로 오르두를 건설한 뒤 함께 도망친 원의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중원을 회복할 희망을 품었다. 토곤 테무르가 몽골리아로 복귀하지 않고 상도에 머물렀던 이유는 몽골리아에 남아 있는 아릭부케 등을 경계했던 탓도 있지만 여전히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명의 입장을 보면, 명은 원의 수도를 빼앗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중원 전역을 완전하게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산서에는 쾨쾨 테무르, 섬서와 감숙에는 이사제, 장량필, 손흥이, 운남에는 양왕 바자라와르미가 아직까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쾨쾨 테무르가 가장 위협적이었다. 때문에 명은 먼저 중원의 잔여 세력을 말끔히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북방으로 전진하는 것은 차순위의 일이었다. 하지만 중원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역시 북쪽을 일단 물리쳐둘 필요가 있었다. 


1369년 6월, 상우춘과 이문충 등이 이끄는 명의 군대가 북진하여 상도를 공격했다. 토곤 테무르는 상도에서 응창으로 피난했다가 1370년 4월 병사했다. 그 해 5월 명의 군대가 다시 응창을 공격했고, 황손 마이다르 발라와 후비 등을 생포해서 돌아갔다. 황태자 아유시리다라가 카라코룸에서 그 뒤를 이었다. 한편 토곤 테무르의 사망과 명의 응창 습격은 아직까지 남아 있던 몽골의 세력들에게 있어서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고 속속들이 명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투항 편상으로 몽골의 통치 범위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유시리다라는 기황후의 아들이다. 그는 감숙, 요양, 운남 등에 흩어져 있는 원의 잔여 세력을 통합해 세력을 구축했다. 쾨쾨 테무르를 도총병이자 우승상으로 임명해 몽골의 군사와 행정을 총괄케 했고 요동에 있는 태위 나가추 등의 도움으로 명을 압박하였다. 때문에 요동의 문제는 몽골의 남진과 명의 북진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1370년 가을 명 태조 주원장은 관리를 파견하여 요양행성의 관민을 초무하는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홍보보는 명의 초무를 거부하였지만 명이 주민을 이주시킬 것을 두려워 한 요양행성 평장 유익이 1371년 금주, 복주, 개주, 해주 등 및 요동의 지리를 담은 지도와 재정 및 인구 등을 기록한 장부를 갖고 명에 항복한다. 이로써 명은 요동에 대한 전반적인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유익의 투항은 몽골이 가진 요동에의 거점을 상실케 하였고 요양행성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던 고가노와 홍보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비록 유익은 홍보보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유익의 투항으로 명은 요동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유익의 투항으로 요동의 정세를 어느정도 파악한 명은 몽골을 완전히 소탕하려는 목적에서 1372년 서달을 대장으로 하는 15만의 군대를 아유시리다라가 있는 카라코룸을 향해 진격시켰다. 그 목적은 카라코룸을 파괴하고 쾨쾨 테무를 생포하여 몽골을 소멸시켜 완전하게 사막을 청소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달의 중로군은 쾨쾨 테무르의 전술에 휘말려 패퇴하였고 이문충의 동로군은 톨강에서 몽골군과 교전하였다가 괴멸되었다. 풍승이 이끄는 서로군만이 감숙 방향으로 진격하였으나 별다른 적을 만나지 못하고 가축들만 노획한 채 복귀하였다. 이 승리로 몽골은 체제를 정비하고 힘을 모을 수 있는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반면 명은 긴밀한 연락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몽골을 근절하겠다는 목적의식만 갖고 성급하게 작전을 개시하였다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승승장구하던 기세가 꺾이는 결과를 얻었다.



(2) 1372-1384 명의 수세 몽골의 공세


몽골은 기세를 올리게 되었고 이후 빈번하게 명을 침범하고자 시도하였다. 1372년 8월 운내를, 그 해 11월에 요동을 공격하였고 1373년 6월에는 응문을 공격, 11월에 다시 대동을 침범하여 명의 방어선을 괴롭히고 변경을 약탈함으로써 중원을 도모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반면 주력부대가 심각한 타격을 받은 명은 막북에 대한 직접적인 정벌을 멈추고 통치지역에 위소를 설치해 세력의 이탈을 막고 한인들을 이주시켜 체제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다. 이후 10여년의 기간 동안 명은 몽골의 정세를 살피는 수세적인 자세로 변했고 몽골과 명은 요동지역을 제외하면 별다른 교전 없이 대체로 소극적인 전략을 유지했다. 


공세적인 전략이 실패로 끝나자 명은 장기전을 대비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일단 몽골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몽골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먼저 요동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요동에 있던 원의 잔여 세력은 유익이 투항한 이후 나가추의 휘하에 들어가 나가추의 세력이 가장 강력했다. 나가추는 원말 요양행성 평장정사로 심양에 거주하다가 원이 멸망한 이후 개원 이북의 이통하 방면을 세력권으로 하고 금산에 거주했다. 이 지역은 서북쪽으로는 몽골 초원지역으로, 남쪽으로는 요동반도에 있는 명을 공격할 수 있는 군사적 거점인 동시에 동쪽으로는 고려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일찍이 토곤 테무르는 중원 회복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요동을 확실하게 장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그를 행성 좌승상에 임명했다가 다시 태위에 임명, 그의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다. 몽골의 지원 아래에서 나가추는 1372년 11월 우가장을 공격하였고 큰 승리를 거두자 이에 고무되어 1374년 11월과 1375년 12월에 다시 한번 공격하였다. 또한 몽골은 고려를 연결하여 세력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몽골과는 관계를 단절하였지만 여전히 나가추와는 통교하고 있던 고려는 몽골이 잇달아 명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체제를 안정시키는 낌새를 보이자 다시 몽골과 국교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카라코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명은 요동을 안정시킬 계획을 장기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1375년 정요도위를 요동도지휘사사로 변경하였는데 이는 군사적 기능만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기관으로로써 군정합일을 통해 이 지역의 방어를 굳건히 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몽골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요동의 나가추를 제압해야 하고, 나가추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고려와의 연결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가추에 대한 초무정책과 동시에 나가추의 좌우를 단절시켜 고립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3) 1384-1388 명의 요동 장악 


1384년 명은 몽골과 고려를 연결하는 중간고리였던 여진부락을 공격, 몽골과 고려를 연결하는 고리를 끊어버리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나구추는 고립되었고 1387년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는 동시에 나가추를 초무하는 정책을 계속하였다. 결국 고립된 상태에 처한 나가추는 휘하의 수백명을 이끌고 우부장 남옥의 진영을 찾아가 투항하였다. 나가추의 투항으로 1368년 원의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던 요동의 몽골 세력은 평정되었고 요동은 명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 나가추를 고립시킴으로써 그의 투항을 이끌어내었고 나아가 고려-요동-몽골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몽골의 한쪽 날개를 잘라버린 것이다.


나가추의 투항은 몽골로 하여금 요동을 완전히 상실케 한 것이다. 대외적으로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몽골리아에 있던 유목 세력들과의 연결을 잃어버렸다. 나가추의 투항이 몽골 아래에 있던 부족들의 연쇄적인 항복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1379년 아유시리다라의 뒤를 이어 몽골의 카안이 된 토구스 테무르는 요동의 재진입을 통해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의도로 몽골의 통치 중심을 카라코룸에서 쿨룬 부이르 지역으로 옮겼다. 하지만 1388년 4월 남옥이 이끄는 명의 군대가 쿨룬 부이르 지역을 급습, 무방비 상태였던 토구스 테무르의 전군을 궤멸시켰다.달라이 나우르 전투에서 태위 만즈 휘하의 수천명이 사망하였고 토구스 테무르와 태자 천보노, 지원 네케르, 승상 시레문 등은 모두 가까스로 도망쳤다. 명은 토구스 테무르의 카툰과 차자 지보노 이하의 10만 명을 포로로 잡고 다수의 가축을 노획하여 돌아갔다. 


10월 토구스 테무르 일행은 몽골리아의 톨강 유역으로 도망쳤으나 오이라트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아릭부케의 후손 이수데르의 습격을 받아 다시 카라코룸 근처로 피신했다. 하지만 재차 이수데르의 습격을 받고 토구스 테무르와 태자 천보노가 독살됨으로써 이로써 몽골의 "북원"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토구스 테무르가 죽은 이후 요동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은 옷치긴 왕가의 아자스리다. 아자스리는 1388년 9월 부하를 이끌고 명에 항복하였다.  



출처 : 윤은숙, 몽골제국의 만주 지배사 - 5장 제국의 해체와 격동의 14세기 말 동아시아, 소나무, 2010, 281-313쪽.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