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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想昭明

사형제의 존폐에 관해

by Mr. Trollope 201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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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삶을 앗아간 이에게 삶을 요구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회는 간단히 말해 부도덕하다."
- 임마누엘 칸트 -



1. 사형제 존폐를 사이에 둔 Kant v. Beccaria 논쟁



권리 위임의 문제에 대하여



사형제 존폐여부를 두고 항상 쟁점이 되는 문제입니다. 사형 폐지론자 중 대다수가 사형제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폐지론자들은 국가 권력의 한계를 논하며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합니다. 베카리아의 다음과 같은 비판이 바로 이러한 쟁점에 의거한 사형 폐지론의 시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조직은 구성원 모두의 총의로 움직인다. 그러나 사회를 조직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탈취할 권능까지 부여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누가 자기 생명을 박탈할 권리를 타인에게 위임하였겠는가? 사형은 하나의 권리가 아니고 또 권리일 수도 없다. 사형은 한 국민에 대하여 국가가 이 국민의 생명을 파멸시키는 선전포고이다." 
- 체사레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中 - 



베카리아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형법학자, 경제학자로서 사형 폐지론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그 첫번째 근거로 사회계약에 포함되지 않은 권리에 의한 형벌 집행은 부당한 것이며 따라서 입법자가 사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계약 위반이자 초주권적 행위라고 주장하며 사형제 폐지를 주장합니다. 헌데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 칸트는 간단히 '소피스트적'인 주장이라며 일축해버립니다.



"인정적인 감정에 따른 동정적인 감상에 약해져, 그(베카리아)는 모든 사형은 그 자체로 불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러한 관점을 내세우는 근거로 사회계약설 안에서는 사형제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카리아가 말하는) 그러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와 같이 스스로의 삶을 처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궤변이자 권리의 곡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누군가가 의지(원)해서 경험하는 것은 처벌이 될 수가 없으며, 게다가 누군가가 처벌 받기를 의지(원)한다고 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 임마누엘 칸트, <윤리 형이상학> 中 - 



감정적이라는 것은 존치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속성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칸트에게는 그 역인가 봅니다.^^ 칸트에 따르면 국가는 살인자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칸트는 국가와의 계약에서 그러한 조항을 단 계약서에는 아무도 사인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사형제는 부당하다는 베카리아의 논거 자체를 부정합니다(사실 로크가 주장하는 사회계약설의 경우, 전쟁상태에서는 생명권의 박탈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로크의 논리대로라면 개인의 개인에 대한 살해 또한 사적인 전쟁상태로 규정될 수 있겠죠).

칸트에 따르면 이런 식의 합의는 애초부터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아무도 스스로의 삶을 그런 식으로 처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그가 처벌 받을 수 있는 행위를 의지(원)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이지 그가 처벌 받기를 의지(원)해서 처벌 받는 것이 아니다(칸트)."라는 말이죠. 간단히 말해서 위와 같은 가설이 성립한다고 해도 그 이유는 베카리아가 말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베카리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이유는 '목숨을 양도하는 사회계약을 인간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사형제는 있을 수 없다.'가 아니라 '인간이 그러한 계약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형제가 있을 수 없게 된다.'라는 것이 칸트의 지적이죠.

그러니까 정의의 원칙에 따라서는 있어야 하는 계약이었는데 자연 상태의 인간 스스로의 한계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된다는 얘깁니다. 이게 논리의 비약이라고 지적하실 분들이 계실 지 모르겠는데 사실 칸트에게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베카리아에게 있어 사회계약은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상정되는 반면 칸트에게 있어서 사회계약이란 법의 정당성을 위한 일종의 이념적 가상으로서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까닭에, 베카리아에게는 사회 계약의 내용이 중요해지지만 칸트에게 있어서는 그 형식적 존재만이 중요한 것이죠.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칸트가 전통적인 관점에 따라 사회계약설을 실제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논의 아래서는 정의가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베카리아식의 사회계약을 인정한다면 법, 곧 정의는 인민 개개인이 각각의 이익을 위해 맺은 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꼴이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정의는 인민 개개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칸트에게 정의란 당위의 차원에 있어 물자체(우리의 인식과는 상관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와도 같은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으나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밖에 상정할 수 없듯이 정의 또한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으나 행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저 존재한다고 상정할 수 밖에 없는 무엇이라는 거죠. 그리고 오직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만 정의는 더 이상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 따라 칸트는 정의가 전 인민에게 보편적 구속력을 가지게 하기 위한 일종의 형식적 절차 혹은 장치로서의 사회계약, 즉 오직 정의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조건 없는 계약이라는 하나의 이념적 가상을 상정합니다. 이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반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의 원리를 추출해내기 위해 신을 긍정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폐지론자들은 칸트에게 치명상을 입기 시작합니다. 이야, 역시 칸트가 괜히 칸트가 아니에요. 흐흐. 여기서 더 나아가 칸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다시 한번 폐지론자들의 폐부를 찌릅니다.



"누군가가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살인한다면 처벌을 받을 것을 의지(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다른 모든 시민들과 함께 법에 복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의미일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들 중 범죄자가 있다면 그러한 법들은 형법을 포함할 것이다. 공동의 입법자로서 형법을 제정한 사람은 법에 따라 처벌의 대상인 사람과 같은 사람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범죄자로서, 그가 입법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여기지는 일은 입법자는 정의롭고 신성해야 한다고 보는 합리적 시선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임마누엘 칸트, <윤리 형이상학> 中 - 



칸트에 따르면 입법의 주체는 처벌의 대상과 동일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베카리아가 말하는 바와 같이 사회 계약에 의해 처벌을 내린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들은 인민 개개인의 의지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처벌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처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베카리아식 논리를 따른다면 그것은 곧 법의 심판에 처벌에 놓인 자의 의지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범죄자는 그 스스로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심판자의 권리를 가지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즉, 칸트는 정의의 문제에 관한 한 인간이 자결적일 수 없다고 보고 그 한계를 명확하게 합니다. 인간이 신적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형제의 유/무용성에 대하여



사형제에 대한 칸트의 관점이 베카리아에게, 그리고 사형 폐지론자들에게 특히나 뼈아픈 것은 칸트가 사형제 존치를 옹호하며 주창하는 원리에 대해 사형 폐지론자들이 맞서 사형제 폐지를 옹호하며 내세울 수 있는 원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폐지론자들은 얼마든지 사형제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진중권이 사형제 존치에 의한 범죄 억지력은 통계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인류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것과 같이 말이죠. 베카리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러한 사형 폐지론자들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사형은 사회안전과 선량한 사회질서를 위해 과연 유용하고 없어서는 안 될 형벌인가? 사형이 무용하고 불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다면, 나는 인간성을 위한 승리를 획득한 셈이 될 것이다!”
- 체사레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中 -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베카리아의 두번째 근거입니다. 형벌의 근거를 그 유/무용 여부로 판단하고 있죠. 그러나 베카리아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칸트는 대단히 격분하며 이렇게 답변합니다.



"형법은 하나의 정언 명령이다. "전 인류의 소멸보다는 한 사람의 죽음이 낫다"는 바리새인의 금언에 따라 처벌의 정의로부터, 심지어는 응당 받아 마땅한 벌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어떤 이익을 찾아 공리주의의 구불구불한 뱀들 사이를 기어다니는 이에게 재앙 있을진저!"
- 임마누엘 칸트, <윤리 형이상학> 中 -



칸트의 이러한 비판은 사형 폐지론자들에게 그야말로 통렬한 것이 아닐 수 없는데 이는 칸트가 다른 사형제 존치론자들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범죄 억지력과 공분의 해소를 들먹이며 사형제 존치를 옹호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칸트는 오히려 폐지론자들이야 말로 침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반해 공리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논증해내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폐지론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심장에 비수를 꽂는 듯한 결정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범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유죄로 판결받아 형벌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서 취급되어야 한다. 그에 대한 형벌로부터 그 본인에 대한 이익과 그와 같은 시민들의 이익을 얻어내려는 모든 생각 이전에 말이다."
- 임마누엘 칸트, <윤리 형이상학> 中 -



이렇게 준엄한 칸트의 말 앞에서 형벌의 근거로 형벌로부터 비롯되는 사회적 이익에 관한 통계를 들이밀던 사형 폐지론자들은 심히 부끄러워집니다. 폐지론자들은 칸트의 말마따나 형벌로부터 얻을 이익을 위해 형벌의 종류와 양정을 결정하려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형벌에 대한 이러한 공리주의는 결국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용인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이 논리를 극단까지 밀고 나가면 독재체제라도 그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면 또한 정당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되는 원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결국 침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권을 근거로 사형 폐지를 주장한 폐지론자들이 사회를 위해 개인을 수단으로 삼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정의가 다른 어떤 일(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때문에 그 자신을 팔아 넘긴다면 정의는 그 순간부터 정의이기를 멈출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윤리 형이상학> 中 -



바로 이것이 정의에 대한 칸트의 입장입니다. 정의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 자체로서 목적일 때에만 정의로서 존재하는 것이죠.



"만약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여기 어디에도 정의를 만족할 다른 대안은 없다. 삶(그것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으며 따라서 범죄와 법적 응보 사이에는 범법자에게 법적으로 죽음을 집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련 등가성도 있을 수 없다."
- 임마누엘 칸트, <윤리 형이상학> 中 -



또한 같은 이유에서 칸트는 죄의 경감이나 사면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칸트는 법이 정의에 그 기반을 둔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범죄에 대한 입법자의 임의적인 용서는 정의를 져버리는, 따라서 법 스스로에 대한 모순이라고 말합니다.




2. 그 외의 쟁점들



생명권과 존엄성에 관하여



또 다른 쟁점은 생명권에 대한 것입니다. 이 쟁점이야말로 정말 복잡하고 민감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생명권의 문제는 법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생명에 우선하는가, 생명이 인간의 존엄성에 선행하는가의 문제는 결국 종교의 자유의 문제까지 건드리게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생명권보다 더 우월한 가치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칸트의 입장을 따르면 사형은 곧 사형수가 그가 저지른 살인에 대해 그의 생명권으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집행하는 것입니다. 즉 폐지론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존치론자들의 입장과는 반대로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위해서 칸트는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명권을 인간의 존엄성에 선행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물론 칸트의 주장을 반박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존엄성은 생명이 있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테니까요. 가치의 문제를 떠나서 칸트가 비논리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도 계실텐데, 칸트에게 있어서는 존엄성이란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에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칸트에게는 '이성'과 '자유 의지'로부터 존엄성이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이성과 자유 의지를 통해 존엄성을 지닌 인간만이 법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한 법은 그러한 인간만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이 살인자에게 그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합당한 책임으로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즉 자유 의지를 가지며 따라서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의무와 자격을 부여받은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위하여, 다시 말해 범죄자 그 자신의 존엄성을 위하여 사형 존치론을 주장합니다. 초월론적인 논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존엄성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 초월론적으로 상정된 가치입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법은 이러한 초월론적 기반 위에 성립하는 것이죠. 그리고 사실 존엄성이 인간의 생명에 기원하다는 주장에 따라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같은 이유에서 안락사도 반대해야 합니다. 심지어 낙태도 마찬가지. 그런데 폐지론자 가운데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듯 하죠.



오판 가능성에 대하여



"인간은 오류 없는 존재일 수 없으므로 사형을 내릴 만큼 충분한 확실성이 결코 보장될 수 없다. 사형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전쟁이요, 법을 빙자한 살인이다.”
- 체사레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中 -



베카리아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며 드는 세번째 근거이자 사형제 존폐에 관한 해묵은 쟁점 중 하나입니다. 즉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판결에 있어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이 항시 존재하고 따라서 비가역적인 사형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폐지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용하기 힘든 비판입니다. 사형은 물론 돌이킬 수 없는 결과입니다. 하지만 사형만이 비가역적인 것은 아닙니다. 벌금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처벌들 또한 그것이 행해졌고 또한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사형제와 마찬가지로 비가역적입니다. 그래도 사형은 다른 처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결과가 아니냐구요? 그러나 이것은 사형 존치론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불완전한 판결에 대한 비판에 더 가깝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명명백백하게 죄가 증명된 경우라면, 그렇다면 폐지론자들은 사형을 허용할까요? 완벽한 판결은 있을 수 없고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라구요? 그렇다면 사형 판결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판결들 또한 비판의 도마에 올라야 합니다. 법 자체가 비판에 놓여야 합니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듯이 올바른 법의 집행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이 존재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정의의 원리 자체까지 폐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판 가능성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3. 칸트를 넘어서/폐지론자들, 화이팅!



따라서 세계적으로 사형 집행국이 줄어드는 추세와는 정반대로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은 오히려 사형 폐지론자들입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거증 책임은 존치론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폐지론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폐지론자들이 진정으로 정의의 편에 서서 사형 폐지를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은 사형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망치로서만 기능하는 사형제 비판에만 존립 기반을 둘 것이 아니라 사형제 비판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폐지론 스스로의 기반에 의해 존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즉 외재적인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내재적 원리에 의해 성립하게 되는 사형 폐지론을 생산해내어 제시하여야만 칸트적 입장에서 사형제 존치를 주장하는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폐지론의 헤게모니가 다하는 날에 폐지론은 사형 판결을 받고 사형제는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겠죠.



항상 사형제 찬성에는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원칙적으로만 따지면 오히려 그 반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