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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想昭明

영어이름을 짓는 한국인들에게 - 에 대하여

by Mr. Trollope 2013. 2. 28.



영어 이름을 짓는 사람들, 외국인을 만나서 자신을 영어 이름으로 소개하는 행위에 대한 외국인 기자라는 사람의 글을 읽었다.[1] 간단히 말하자면 이는 문화적 열등감에서 나오는 행동이며 우리가 진짜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을 간단히 적자면, 한국인이 영어 이름을 짓는 까닭은 문화적 열등감이 아닌 상대에 대한 배려심에서 나오는 행동이며, 그 배경에는 한국에 오면서도 한국어를 한두 마디 이상 하지 못하는 이 거지 같이 오만한 외국인들의 무례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이름은 당연히 한국어 이름이 있지만 영어 이름으로 Joshua를 사용한다. 이는 내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소설책 속에서 따온 이름이면서 동시에 내 이름의 이니셜 JSH에서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나의 이름은 한자로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굳이 중문명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만약 없었다면 나는 중문명도 만들었을 것이다


먼저 이름이라는 것은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짓는 것이다.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 나의 이름이지만 상대로 하여금 나를 어떻게 부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렇게 불러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양놈들이 자신들의 언어가 아니면 좀체 발음을 하지 못하는 게으른 오만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이름을 알려주더라도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인이 Michael마익홀로 읽는 것이 이에 비해 약과라고 하면 좀 심한게 될까.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름이 그 따위로 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들에게 편한 발음의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부탁하는 것이다. 내 경우, 본명을 이야기해 주었을 때 제대로 발음할 수 있던 양놈은 없었다. 결국 Mr. 정이라고 부르는데하지만 이건 또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 성씨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며, 전혀 예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정 씨라고 부른다는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또는 교양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나 통용되는 것이며, “정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한 이것은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Mr.가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Mr. Smith는 그들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 은 이름이 될 수 없다. 나를 Mr. 정 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딜봐도 나의 한국어 이름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없다.


둘째, 외국어 이름을 짓는 것은 배려에 의한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의 사용자가 만났을 때, 그러니까 다수의 외국인 사이에 우리가 들어가 생활할 때 뿐만 아니라 소수의 외국인이 다른 언어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왔을 때 모두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지어 불러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영어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갖는 게 한국이기 때문에 착각할 수 있겠지만 다른 나라 사이에서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는 다르다. 그들이 직접 다른 언어 속으로 들어가 생활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외국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름을 그들에게 맞춘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자연스럽게 요구하곤 한다. 내게 익숙한 학자의 경우를 살펴보면 John F. Fairbank의 경우는 費正淸, Timothy Brook의 경우는 卜正民, Jonathan Spence의 경우는 史景遷, Stephen Owen 文所安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이들이 중국인들에게 문화적 열등감을 갖고 있어서 이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인가아니다자기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길 원해서일 뿐이다조나단 스펜스의 경우를 그냥 뒀으면 斯彭斯로,티모시 브룩은  따위로 불렀을 것이다그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그들이 멋대로 부르는 모습을 원치 않아 대신에 사마천의 이름을 본 따 史景遷으로또는 논어를 출전으로 한 文所安 같은 이름을 택했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냔 말이다나는 이게 몹시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세번째로 지적할 것은 독일 총리가 한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자신을 한국어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느냐는 말에 대한 것이다. 이건 웃기는 소리다. 엄격하게 모든 것을 따지고 들어가는 외교관과 현실의 융통성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이 영어 이름을 짓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인이 영어 이름을 짓는 것은 이상한 행동이라는 논리는 더욱 웃기다. 같은 알파벳을 공유하는 나라 사이에서는 상대방 국가에게 맞추어 이름을 짓는 것이 흔한 것이 아니지만, 문자를 달리하면 이건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랍 국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현지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이름으로 새로 짓는 것을 심심치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한국인들은 중동 국가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동아시아를 살펴보면 같은 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은 굳이 서로의 나라에 맞춰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다. (다카키 마사오처럼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한) 왜냐하면 3국은 공통적으로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굳이 상대방에게 맞추어 이름을 지을 필요없이 그냥 원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알파벳을 사용하는 유럽의 경우와 한자를 사용하는 동아시아의 경우 모두 동일하다. 단지 유럽의 사례를 영어에 갖다대어 한국인의 태도를 비판한 것은 유럽의 사례가 마치 전세계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오만함이다. 


넷째, 저 글 속에서도 받아들일만한 부분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찾아오면서도 간단한 한국어 몇 마디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적이다. 이 오만한 이방인들은 전혀 배움이라는 것을 모른다. 지금 중국에 도착해서 대학교 기숙사로 이동한 첫날 만난 한 프랑스인은 중국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오직 영어 하나만 믿고 중국에 찾아왔다. 진짜 문제는 바로 이런 거다. 또한 주목할 점은 바로 이것이 외국인 기자에 의해 쓰여진 글이라는 점이다. 그가 어떤 근거를 제시했나? 어떤 이론을 이야기했나? 아니다. 그냥 Opinion일 뿐이다. 과거 9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글이 숱하게 있었다. “외국에서는”, “유럽에서는 안 그러는데”, “서양에서는 이렇게 하더라등등. 하지만 이런 글이 설득력을 갖고 널리 퍼진다. 시비의 기준을 서구에 두고 그들의 행동에 비추어 우리를 판단하고자 하는 태도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것이야말로 열등감이다. 영어이름을 짓는 일 따위가 아니라. 외국인이 한국에 찾아오면서도 한국어를 하지 않아도 되게끔 하는 태도,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하는 말 자체가 설득력을 갖는 현실. 스티븐 잡스가 연설을 하면 명언이 되고 신림동에 사는 백수가 얘기하면 허풍이 되는 게 현실이라지만, 애플 사의 사장과 한낱 외국인 기자라는 두 신분 사이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지 않나?





또한 곁가지로 한가지 더 말하자면, “진짜 이름이라는 관념을 제기한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무슨 얼어죽을 진짜이름이냔 말이냐. 진짜 이름이란 것이 정말 필요할까. “진짜란 게, 꼭 하나의 존재에 한가지 이름만 붙어 있어야 1:1로 대응되는 것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모르겠다. ID를 짓고, 닉네임을 짓고, 필명을 짓는 것이 익숙한 세대로서 그런지 몰라도 난 영어 이름을 지을 때 이것도 하나의 닉네임에 불과하다고 여긴 것 같다. 어찌 보면 내 한국어 이름조차 그냥 주민등록번호와 같이 랜덤으로 주어진 기호일 뿐일지도 모르지 않나. 새로 하나를 만드는 것이 대체 무슨 큰일이냐고. 



[1] 확인 결과 다이엘 튜더라는 이코노미스트의 서울 특파원이다. <진짜 이름을 부르고 싶다>, 『중앙선데이』 293, 2012 10 2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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