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瀟湘館/우즈베키스탄(2007)

사마르칸트 ① : 도시의 역사

by Mr. Trollope 2015. 2. 20.



Samarqand / Самарка́нд


사마르칸트에 도시 문명이 시작된 것은 적어도 기원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초기의 역사는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9년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사마르칸트는 소그디아나의 중심지였으며 부유했고 둘레가 13km에 달하는 요새로 둘러싸여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이 도시를 차지한 뒤 이렇게 말했다. “이 도시의 부유함에 대해 내가 들었던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고고학 발굴은 이 지역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쿠샨 조의 권력이 이곳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원후 1세기에 사마르칸트는 황폐해져 있었다. 그러나 3세기 이후부터 세계 무역에서 소그디아나 지방을 통과하는 사막길이 각광받게 되면서 소그드인들이 실크로드의 무역을 장악했고, 사마르칸트는 다시 부흥하였다. 이 시기에 사마르칸트는 소그디아나 지방의 많은 군소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다. 이후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소그디아나 지방은 서진하는 이슬람 군의 목표가 되었다. 712년에 이슬람군의 장군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은 사마르칸트를 점령한 뒤, 최초의 모스크를 세웠다. 이후 반란과 이슬람군의 재정복이 반복되지만 결국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문화권으로 편입되었다. 751년의 탈라스 전투가 끝난 뒤에는 포로로 잡힌 중국인 제지기술자가 사마르칸트에 오게 되었는데, 이후 사마르칸트는 제지업으로 명성을 날렸다.


9세기에 사만 조 치하에서는 사마르칸트는 다시 부흥하였다. 도시는 해자와 성벽으로 방어되었으며, 도로는 돌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납을 씌운 수도관을 통해 모든 집과 정원에 물이 공급되었다.

사만조 시기에 부하라가 수도로 지정되면서 마와란나흐르 제2의 도시로 머물렀다. 이슬람 초기에 이 도시는 쿠한디즈(요새), 샤흐리스탄(성내), 라바드(교외)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사마르칸트의 주 수원은 도시의 남쪽을 흐르는 다르흐람 운하였으며, 그로부터 보조운하가 갈라져 나와 도시에 물을 댔다. 그 외에도 제라프샨 강과 이어지는 시야압 운하가 있었다. 샤흐리스탄과 쿠한디즈 구역은 성벽과 깊은 해자로 방어되었다. 그리고 해자를 건너 샤흐리스탄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납을 씌운 수도관이 건설되었다. 샤흐르시탄에 가까운 라바드 지역 역시 성벽으로 둘러싸였으며, 사마르칸트 오아시스 전역은 또 다른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하지만 10-12세기에 권력이 사만조에서부터 카라한조, 셀주크조, 카라키타이로 넘어가면서 사마르칸트는 쇠퇴해갔다. 1207-1212년 호라즘 샤 무하맘드의 침입 이후 인구는 40만명에서 10만명으로 감소하였다. 하지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것은 1220년 칭기스칸의 몽골군의 침입이었다. 이들이 사마르칸트의 생명줄인 운하를 막아 버리자, 사마르칸트인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으며, 많은 수의 기술자들을 몽골로 데려가 버렸다.


그러나 1370년에 티무르는 트랜스옥시아나 지방의 패권을 장악한 뒤 사마르칸트를 자신의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으로부터 장인들을 데리고 와서 사마르칸트를 아름답게 꾸미게 하였다. 티무르의 궁전인 Kok Serai는 요새 안쪽에, 서쪽 성벽에 인접한 곳에 위치했다. 하지만 그는 도시 밖에서의 생활을 선호했고 비단과 태피스트리로 호화롭게 치장한 천막에서 살았다.


티무르의 죽음은 내분을 유발하였고 제국의 영역을 축소시켰다. 그래도 이후 반세기 동안 사마르칸트는 계속해서 티무르의 손자인 울르그 벡 치하에서 번영하였다. 하지만 유목민인 우즈벡족의 융성은 티무르 조의 권력과 사마르칸트의 번영에 종말을 가져왔다.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는 1512년에 세번째로 사마르칸트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우즈벡족은 이내 이 도시를 수복하였다.


16세기 이후로는 사마르칸트를 누르고 시바니 조나 아스트라한 조 치하의 부하라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육상 실크로드의 쇠락으로 이 지역이 전반적인 쇠퇴를 겪었다. 17세기에 우즈벡 족의 지배자인 얄랑투시 바하두르가 레기스탄에 세운 신학교 건물을 제외하면 대건축물도 거의 지어지지 않았다. 지진의 피해와 약탈, 내전 등으로 인해 18세기가 되었을 때 이 도시는 사실상 유령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1770년에 부하라의 아미르가 이곳에 다시 사람들을 거주시키고, 집과 요새, 성벽을 수리하자 도시가 조금 살아났다.


19세기에 사마르칸트는 러시아에 점령되었다. 러시아 장군인 카우프만은 단지 3,500명 만을 이끌고 항복을 받아냈다. 대부분의 병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카우프만은 다시 도시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러시아의 점령은 도시의 외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성벽은 파괴되었고, 서쪽으로 러시아인 구역이 넓게 확산되었다. 1888년에 트랜스카스피아 철로가 사마르칸트까지 이어지자, 도시가 발전하고, 노동계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챠르 체제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다.


1917년 말에는 레기스탄에 혁명의 붉은 기가 걸렸다. 1925년에 대중 집회에서는 사마르칸트가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로 선언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에 수도는 타슈켄트로 옮겨졌다.) 산업 발전으로 인해 도시의 인구는 4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공장, 회관 아파트, 대중교통수단 등이 들어서면서 도시는 소비에트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