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瀟湘館/우즈베키스탄(2007)

사마르칸트 ② : 레기스탄 Registan 주변

by Mr. Trollope 2015. 2. 20.



레기스탄 Registan

‘레기’는 타지크어로 모래, ‘스탄’은 땅이란 의미로, 따라서 레기스탄은 모래의 땅을 뜻한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은 광장 북쪽을 흐르는 운하 주변에 모래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레기스탄은 사마르칸트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킹기스칸 시대부터 이미 사마르칸트의 중심지였으며 칸의 알현식, 사열식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티무르 시대에도 이곳은 여섯 개의 간선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이었고, 바자르가 위치했다.

 15세기에 티무르의 손자인 울르그 벡은 광장의 서쪽에 신학교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Ulugbek Madrassah) 반대쪽에는 기존에 있던 바자르를 헐고 여행자 숙소(khanagha)를 지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대상을 위한 숙소 Mirza Caravanserai를, 남쪽에는 모스크(Kukeldash Mosque)를 세웠다. 모스크에는 나란히 목욕탕을 건설하였다. 광장에서는 열병식과 공개처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7세기가 되었을 때 성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광장 서편의 신학교뿐이었다. 우즈벡의 지배자 얄랑투시 바하두르(Yalangtush Bakhadur)는 수도승 숙소와 대상 숙소를 헐고 두 개의 신학교를 새로 지었다. 그리하여 오늘날과 같은 배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8세기에 레기스탄은 다시 황폐해졌다. 울르그 벡 신학교의 2층이 붕괴되었으며, 학생들 대신 부엉이들이 그곳에 살고, 문에는 비단 커튼 대신 거미줄이 쳐졌다. 세 개의 신학교는 19세기에 종교적 부흥이 있기까지 모두 곡물 창고로 사용되었다.

볼셰비키는 광장의 정치적 잠재성을 부활시켰다. 그들은 이곳에서 당 대회를 열고 베일을 대량 소각시켰으며 반혁명 재판을 진행했다. 그들은 또한 신학교의 미나레트(첨탑)을 곧게 하고, 돔을 재건하였으며 타일을 복구했다. 그리고 그 동안 퇴적물이 쌓여서 건물의 아랫부분을 덮고 있던 것을 제거하여 건물의 전체가 드러나게 했다.




울르그벡 신학교 Ulughbek Madrassah


울르그 벡은 티무르의 아들 샤루흐의 손자로 아버지가 헤라트를 수도로 하는 호라산 지역을 다스리는 동안,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을 다스렸다. (1409-1449) 그는 수학, 역사, 천문학 등 세속적 학문의 발전을 장려하였으며 (그는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무슬림의 의무이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많은 건축물을 세웠다.


울르그 벡 신학교는 1417-1420년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그는 직접 천문학 강의를 했다고 한다. 천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 건물의 장식에서도 나타나는데 입구(pishtak)에는 밤하늘의 별자리가 표현되어 있다. 외벽의 모자이크와 마졸리카 패널은 꽃과 아라비아 문자를 모티브로 하였으며, 가장 돋보이는 것은 별모양의 도형 안에 꽃무늬가 들어있는 기하학적인 기리흐 양식이다. 두 개의 미나렛은 벌집모양의 무콰르나 양식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울르그 벡의 탄생 600주년을 맞이해 진행된 복구 작업으로 내부도 사마르칸트의 전성기 시절과 유사하게 단장되었다. 정문을 지나서 들어가면 사각형의 안뜰이 나오는데, 네 개의 거대한 아이완(둥근 천장으로 된 공간을 말하며 삼면은 벽으로 막혀 있고 한 면만 열려 있다.)과 50개의 후즈라(학생들의 방)가 모습을 드러낸다. 모퉁이의 돔 아래에는 넓은 다르스호나(강의실)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다.





시르 도르 신학교 Shir Dor Madrassah


이 건물은 1619년과 1636년 사이에 얄랑투시 바하두르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의 건축가들은 울르그 벡 신학교의 규모와 고귀함에 걸맞은 건물을 지으려 했지만 쿠란에서 좌우대칭을 금지했기에 똑 같은 형태로 지을 수가 없었다. 울르그 벡 신학교와의 차이점은 모스크가 없고, 뒤쪽에 다르스호나가 있으며 측면에 보조 입구가 있다는 점이다.


외벽은 풍부한 색채의 기하학적인 꽃무늬와 문자들로 덮여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정면 아치 위쪽에 표현되어 있는 사자의 형상이다. ‘사자를 지니고 있는’이라는 의미의 건물 이름(시르 도르)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사자 뒤로는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데, 이러한 조각들은 형상의 표현을 금지하는 이슬람의 터부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 사자가 얄랑투시를 상징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며, 동물과 태양의 묘사가 조로아스타교의 영향이 남아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틸랴 칼리 신학교 Tillya Kari Madrassah


이 건물은 시르 도르 신학교와 마찬가지로 얄랑투시 바하두르에 의해 1646년에서 1660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미나렛 대신에 모퉁이에 작은 탑이 세워졌으며, 외벽의 장식은 시르도르 신학교와 유사한 색채의 태양의 상징과 꽃무늬로 되어 있다. 다른 신학교 건물 정면의 얇은 벽감에는 창문이 없지만 틸랴 칼리 신학교의 정면에는 창문이 뚫려 있다. 내부는 군달 양식의 황금잎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여기서 ‘황금을 입힌’이라는 뜻의 ‘틸랴 칼리’라는 이름이 나왔다.


틸랴 칼리 신학교의 남동쪽에는 다흐마(장례단)가 복원되어 있다. 이곳에는 아불하리 조의 일원 31명의 묘석이 있다. 그리고 가까이에는 초르수가 있는데 이는 18세기에 붕괴된 비비하님 모스크에서 가져온 자재를 갖고 만든 것으로 우즈벡의 전통모자인 ‘토프’를 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