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황하의 흐름 변천사

by Mr. Trollope 2015. 10. 23.

 


 

황하는 중국을 동서로 관통하는 강으로, 중국 역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황하는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영웅과 제국이 위에서 죽었다. 중국어에서 강을 뜻하는 말인 '하()' 원래는 황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다가 모두 가리키는 말로 확장된 것이다. 고유명사가 일반명사로 의미가 확장된 케이스로, 황하가 중국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거대한 흙탕물 덩어리를 보고 있노라면 장엄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황하는 이름 그대로, 거의 대부분이 진흙이다. 물이 절반, 나머지 절반이 진흙이라고 보면 된다. 옛날에 "황하의 물이 1말이면 진흙이 6되"라고 할 정도다. 서쪽 고원지대에서 흘러 나와 화북평원의 평탄한 지형에 도착할 때 쯤이면, 이 엄청난 진흙투성이는, 그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제멋대로 흘러나갔다. 문명의 요람이 되었다는 점, 물길의 변화가 심하다 못해 제멋대로였다는 점, 이 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강 전체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확대되었다는 점, 모두 나일강과 똑같다.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람들도 흔히 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황하와 관련 것이다. 황하의 물길이 시간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도, 황하가 있어선 안되는 곳에 황하가 있는 것으로 그려놓는다거나, 황하가 없는데 황하가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그런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지도 말이다. 이때 황하는 산동반도 남쪽으로 흘러야 맞다.  




황하는 지금껏 수천번 흐름을 바꾸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크게 7번으로 나눈다.[1] 하지만, 더 간단히 나눌 수도 있다. 황하의 변천 크게 3번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황하가 북쪽으로 흐르던 시기로 고대~1048년까지이다. 둘째, 황하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회수와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나가던 시기로 1048~1855년까지이다. 셋째, 황하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현재 우리가 보는 것처럼 흐르게 된 시기로, 1855년부터 현재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1. 고대~1048년(송나라 시기) 까지

 

 

 

 

위의 지도는 한나라 시기의 황하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황하가 지금보다 훨씬 북쪽으로 흘러가서 거의 천진 근처에서 바다로 빠져나갔다.



고대에는 황하가 하북 평원에 도착할 때쯤이면 유속이 느려져 여러 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에 구하(九河)”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때 황하의 하상(河床)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당시 산해경(山海經),상서(尚書),한서(漢書)에 기록된 3갈래의 물길이 있는데, 모두 산동반도 북쪽을 지나 바다로 빠져나갔다. 당시에는 황하에 제방을 설치하지 않았고 때문에, 홍수가 발생하면 극심한 피해를 입곤 했다. 제방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기 이후의 일이다. 산해경상서에 기록된 물길은 이 때 말라버리고, 한서에 기록된 물길만 남았다. 하구(河口)는 지금의 황화(黃驊) 부근에 위치했다.

 

전한 시기에, 황하의 범람은 11차례에 달했는데, 대부분 중후기에 발생했다. 한 무제 원광 3(BC 132), 호자(瓠子, 지금의 복양濮陽 서남쪽)에서 황하의 제방이 터져 강물이 동남쪽으로 크게 돌아 사수(泗水)를 지나 회수로 빠져나갔다. 이것이 전한 시기에 발생한 홍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뒤 원봉 2(BC 109)이 되어서야 동남쪽 물길이 막히고 다시 원래의 물길로 돌아갔다. 그 뒤에도 황하의 범람은 계속되었다. 왕망이 신을 건국한지 3년째 되는 해(AD 11), 황하의 제방이 터져 오랫동안 이것을 다스리지 못했다. 이 때 범람해서 생긴 물길이 제하(濟河)와 변하(汴河)의 부근으로 흘러 장장 60년 동안이나 이어졌는데 후한이 들어선 이후 왕경(王景)이 치수에 성공한 뒤에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후한 영평 12(AD 69) 왕경(王景)의 감독 하에 수십만의 인력을 동원하여 종합적인 치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때 황하에 제방을 건설하는 한편, 강바닥을 파내고 강둑을 보강하는 등, 황하의 물길을 고정시키기 위한 작업이 시행되었다. 이 작업으로 인해 물길을 만들고 제방을 쌓아 형양(滎陽)에서 천승(千乘, 지금의 산동성 고청현高青縣) 해구까지 천여 리의 물길이 완성되었다.

 

한이 멸망한 이후에도, 왕경의 치수공사가 효과를 보았던 것과 화북평원 지역의 생태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토양침식이 늦춰진 이유로 인해 약 700년 가량의 시기 동안 황하의 물길은 안정을 보였다. 당 중기 이후 황하의 범람이 다시 심해졌다. 510국 초기가 되지 황하의 범람 기록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수십년 동안 황하는 빗물이 넘쳐 제방이 터지기도 했지만, 전쟁 통에 제방을 터뜨려 적을 공격하는 식의 전술을 사용한, 인위적인 홍수도 많았다.

 

통계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송요금의 370년 동안 황하의 범람 기록은 무려 210여 차례에 달한다. 송 태조 개보 4(971) 11, 황하가 범람하여 여러 주를 덮쳤다”, “5, 황하가 범람하여 복양(濮陽)과 양무(陽武)의 제방이 터졌다.” 태종 태평흥국 2(977) 7, “맹주(孟州)의 온현(溫縣), 정주(鄭州)에서 형택(滎澤), 전주(澶州)의 돈구(頓丘)에서 제방이 터져 물이 넘쳤다.” 경우 원년(1034) 전주(澶州)에서 황하가 넘쳐, 여기에 더해 이후로도 제방이 터지는 등의 일이 거듭되어, 전주(지금의 하남성 복양(濮陽) 부근) 근처에서부터 새로운 물길이 만들어지기 시작되었다. 무체(無棣, 지금의 산동성 빈주(濱州))에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인데 뒤에 사서(史書)에서는 이것을 횡농하(橫隴河)”라고 불렀다.

 


 

 



2. 1048년(송나라 시기)~1855년(청나라 말기)까지

 

 


해당 지도는 원나라 시기의 황하의 모습이다.  이 때 황하의 물길이 크게 바뀌어서 산동반도 남쪽으로 흐르게 되었다. 


경력 8(1048), 다시 전주(澶州)의 상호(商胡) 부근에서 제방이 터져 북쪽으로 흐르는 물길이 새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북류(北流)”라고 불렀다. 니고(泥沽, 지금의 천진시 동남쪽)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가우 5(1060) 황하가 위현(魏縣) 근처에서 제방이 터져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이 새로 만들어졌는데 이를 동류(東流)”라고 불렀고 이고하(二股河)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체(無棣) 북쪽에서 바다로 빠져나갔다. 당시 송나라 내부에서는 황하의 북류를 남길 것인지 동류를 남길 것인지의 논쟁이 격렬하게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수십년을 이어갔다. 자연조건만을 놓고 본다면 북류가 훨씬 자연스럽고 유량도 많았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북류는 거란과 송의 국경 사이에 있는 수택 지대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송나라의 입장에서 불리했다. 이른바 중국의 험준함을 잃는 것은 거란에게 이로운 것이다라는 논리였다. 희녕 2(1069) 황하의 강물을 모두 동류로 빼내기 위해 북류를 막기 시작했다. 황하가 동류로만 바다로 빠져나가게 된 것은 11년 동안 이어졌다. 원풍 4(1081) 전주(澶州)에서 황하의 제방이 터져 다시 천진(天津) 서쪽에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물길이 생겼다. 원우 8(1093) 다시 인위적으로 황하의 물길을 동쪽으로 빼내려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원부 2(1099) 다시 황하의 물이 크게 범람하여 황하의 주류는 북쪽으로 빠져나가게 되었고, 동류는 물길이 막혔다.


남송 건염 2(1128), 금나라 군대의 남하를 막기 위해 동경(東京)을 지키던 두충(杜充)이 활주(滑州)의 제방을 터뜨렸다. 황하의 물이 넘쳐 동남쪽으로 흘러들어갔고 사수(泗水)와 제수(濟水)와 만나 바다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황하가 산동반도 북쪽의 발해로 흘러들어가던 것이, 황해로 빠져 나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금 대정 8(1168) 다시 황하의 제방이 터져 단현(單縣) 부근에서 지류가 만들어져 남류(南流)”라고 불렀는데 서주(徐州) 근처에서 옛 물길과 합하여 비주(邳州)를 지나 회수와 합류하였다. 남류가 전체 유량의 6/10, 북류가 나머지 4/10을 차지하였다.

 

몽골이 금/송과 전쟁을 시작하는 도중 황하가 다시 두 차례 제방이 터져서 천흥 원년(1232)과 천흥 3,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하는 도중, 황하의 제방을 터뜨려 공격하였다. 이전까지 황하의 황하의 남쪽 물길은 당나라-송나라 시기의 변하(汴河)와 다르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크게 벗어나 와하(渦河)와 영하(潁河)에서 회수로 합류하는 물길이 이어지게 되었다. 대덕 원년(1279) 기현杞縣)에서 제방이 터져 서주(徐州)에서 사수(泗水)와 합해 회수로 이어지는 물길이 만들어졌다. 이후로 이때부터 황하의 물길이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정 4(1344) 황하가 백모구(白茅口, 지금의 조현(曹縣) 서북쪽)에서 제방이 터져 큰 물길이 북쪽으로 흘러 회통운하(會通運河)로 이어져 제남(濟南)과 하간(河間)으로 이어졌다. 지정 11년 가로(賈魯)가 치수를 시작하여 물길을 트고(), 강바닥을 파내며(), 제방을 쌓아 막는() 방법을 사용하여 북류를 막고, 황하의 물길을 하동(河東) 남쪽에서 사수(泗水)를 거쳐 회수(淮水)로 이어지는 옛 물길과 이어지게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가로하(賈魯河)”이다. 이 물길은 황릉강(黃陵岡, 지금의 난고현(蘭考縣))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서주(徐州)에서 사수(泗水)로 흘러 들어가며 여기에서 회수로 이어진다.

 

명 효종 홍치 7(1494) 황하의 5번째 대격동으로 불리는 변화가 생겼다. 명초에 황사는 여러 갈래의 물길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모두 회하(淮河)를 거쳐 바다로 빠져나갔다. 명 중엽 홍치 2(1489) 개봉(開封) 근처에서 제방이 터져 황하의 물이 변하(汴河), 사수(), 와하(渦河), 영하(穎河) 등의 강을 덮쳤는데, 이 때에도 최종적으로는 회하(淮河)에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나갔다. 하지만 황하의 물이 범람하여 북쪽으로 흘러 들어가 대운하의 물길을 덮칠 우려는 남아 있었다. 명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강남의 식량을 북경으로 운송하는 물길의 안전을 위해, 명나라는 계속해서 황하의 치수공사를 진행했다. 백앙(白昂)과 유대하(劉大夏) 등이 이 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대하는 태행(太行) 내외에 제방을 건설하여 하나는 조성(胙城)에서 우성(虞城)까지 “360, 다른 하나는 상복(祥福)에서 소송(小宋)까지 모두 “160에 달했다. 가정에서 만력 연간 사이에 모두 4번이나 치수공사를 진행하여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때부터 황하의 물길은 하나로 합하여 변하(汴河), 사수(泗水)를 지나 회수(淮水)로 들어가 여기에서 바다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이로써 당시 운하가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3. 1855년(청나라 말기)~현재

 


  지금 우리가 보는 그대로의 황하의 모습이다.  



함풍 5(1855) 6, 난양(蘭陽, 난고현)에서 황하가 범람하였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한창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치수공사를 벌일 능력이 없었다. 결국 황하의 물길이 크게 변해 대청하(大清河)를 지나 이진(利津, 지금의 산동성 북부)에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새로운 물길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보는 것과 비슷한 황하의 모습이 되었다. 함풍 연간에 물길이 변화한 이래 동치 말년(1874)에 이르기 까지, 황하의 유속이 느려져 여러 갈래의 물길이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는 장추(張秋)에서 대청하(大清河)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고 이것이 나중에 황하의 본류가 되었다. 광서 원년(1875)에서부터 광서 10년까지, 거대한 제방이 만들어져 새로 만들어진 물길이 어느 정도 정비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에 보는 황하와 대체로 일치한다. 청나라가 망한 이후로 현대 중국이 생기기도, 황하의 물길은 조금씩 계속해서 변화했다.


19386, 국민당 정부는 황하의 물길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화원구(花園口)의 제방을 터뜨렸다. 황하의 물이 범람하여 가로하(賈魯河)와 영하(潁河) 그리고 와하(渦河) 사이의 일대로 흘러 들어갔고, 이 때 넘친 물이 회수 부근의 홍택(洪澤), 고우(高郵) 등 여러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다시 모여 장강(長江)에 합류하였다. 19473월이 되어서야 화원구(花園口)의 제방을 보수하였고 황하의 흐름은 원래의 물길로 돌아갔다. 이 때 인공적으로 일으킨 범람으로 인해 모두 54의 면적을 휩쓸었고 사망자가 89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9년 반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보수할 수 있었으니, 이 때 발생한 피해는 황하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보기 드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의 역사는 별로 얘기할 만한 것이 없다. 오늘날 보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전체를 함께 비교한 지도다.



 

 

 



 

[1] 1) BC 602, 2) AD 11, 3) 1048, 4) 1194, 5) 1494, 6) 1855, 7) 1938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고전서 목록  (0) 2022.04.12
명대의 추관推官  (0) 2015.10.09
청대 북경의 집문제  (0) 2015.07.10
옛날 중국의 지명을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  (0) 2015.06.25
16세기 몽골의 풍습  (0) 201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