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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청대 북경의 집문제

by Mr. Trollope 2015. 7. 10.



청대 지방출신의 관리가 북경에 생활하게 되었을 때, 그는 집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먼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등의 그런 행운은 없다. 황제로부터 저택을 하사받는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북경에서 생활하게 된 관료가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직접 집을 짓거나, 혹은 집을 구매하는 것이다 둘째는 집을 빌리는 것 또는 세를 들어 사는 것이다. 청대에는 만주족과 한족의 생활공간을 분리했기 때문에 만주족 관리들은 북경의 내성內城, 한족 관리들은 외성外城에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관리들 중 일부는 외성에 자신만의 저택을 갖고 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강희 연간에 살았던 곤산昆山 사람인 서건학徐乾學은 관리가 된 이후 선남宣南(선무문 남쪽을 말함) 지구에 집을 사거나 혹은 집을 짓거나 해서 여러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 건륭 연간에 관직이 예부상서禮部尚書에 까지 올랐던 절강浙江 부양富陽 사람인 동방달董邦達은 미시 골목米市胡同에 거대한 저택을 갖고 있었는데 그 집이 굉장히 크고 화원이 수려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한족 관리에게 있어서 굉장히 희귀한 것이었다. 북경의 땅값이 비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북경에 살게 된 관리들은 생활형편이 좋지 못했다.


집을 빌리는 것은 대부분의 한족 관리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관리가 지금은 북경에 살게 되었더라도 언제 상황이 변화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승진을 하거나 지방관으로 발령이 나거나 혹은 은퇴를 하거나) 또한 부모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일도 흔했기 때문에 북경에서 쭉 십년 이상 거주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또한 북경에서는 회관會館이나 민간에서 운영하는 셋방에 산다는 옵션도 존재하고 있었다. 공급과 수요의 측면에서 볼 때 단기간 방을 빌리는 것이 훨씬 이익이었다.


수도인 북경에서 집을 빌릴 때 관리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첫번째 문제는 주택의 면적 그리고 체면의 문제였다. 조정의 관원이라는 신분으로서 적당한 크기의 집을 구해야만 위신이 서는 문제였기 때문에, 아무 셋방살이나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많은 관리들은 경제 사정이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큰 집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단 어엿하게 갖출 것은 갖춘 사합원四合院 정도는 빌려야 체면이 산다고 믿었다. 만약 다른 조건만 허락된다면 화원이 딸린 집에 살고 싶어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청 말기에 관직을 지냈던 이자명李慈銘은 북경에서 생활할 때 보안사 거리保安寺街의 옛 민절총독閩浙總督의 집에서 생활했는데 규모가 20여 간이었고 집 안에는 화원과 채소밭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정도면 북경에 사는 관리 중에서 꽤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리가 집을 빌릴 때 맞닥뜨리게 되는 두번째 문제는 집값의 변동이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3년마다 한번씩 찾아오는 회시會試였. 3년마다 이 시기가 되면 북경의 외성에 위치한 셋방의 가격이 요동을 쳤다. 동시에 북경 관료계의 상황이 변화할 때마다, 관리들이 북경으로 들어오거나 혹은 나가거나, 또는 임지를 바꾸거나 했고, 또 관리의 수입도 그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했기 때문에 이것이 집을 고르는 문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청대 관리들이 남긴 시 중에서 이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강희 연간에 대학사大學士를 지낸 진정경陳廷敬은 일찍이 “5번의 봄 동안 3번 집을 옮겼다고 하였다. 건륭 연간에 살았던 전대흔錢大昕 역시 (=북경)(=하북성)에서 두번의 여름과 겨울을 지내”, “호방채시虎坊菜市에서 3번 집을 옮겨라고 하였다. 가경 연간에 진사가 되었고 뒤에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士에 까지 오른 기준조祁寯藻 역시 내가 북경에 와서 관리가 된 뒤 10년 동안 4번 집을 옮겼다고 하였다. 이런 구절은 당시 관료들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위에서 나온 전대흔과 같은 경우 건륭 17(1752) 6월 북경에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신선 골목神仙胡同에서 살았다. 그 해 가을, 심가하(潘家河) 근처로 이사하였고, 건륭 19(1754) 다시 집을 이웃 거리로 옮겼고, 그 이후에 주소가珠巢街, 선외대가宣外大街 등으로 옮겨가며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레를 끌고 이리 저리 고단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둥지를 틀 나무를 찾지 못한 새와 같다고 한탄하였다.



관리들이 부딪친 세번째 문제는 셋방이 주로 선남 즉 선무문 바깥 그 중에서도 특히 선무문외대가宣武門外大街 양측과 채시구菜市口 남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청대 중앙 6부가 모두 정양문正陽門 내에 위치해 있었다. 선무문 바깥은 정양문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것이 출근하기에 편리했다. 둘째, 남쪽 지방 또는 강남의 사대부가 북경에 들어올 때 노구교盧溝橋에서 광안문廣安門으로 들어오는 길이 가장 선호되었기 때문에 선남 지구에 몰려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셋째, 명대 선남은 땅이 넒고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경치가 수려했다. 당시 고관대작들이 이곳에 별채를 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세를 내어줄 만한 좋은 집이 많았다. 또한 도연정陶然亭, 요대窯台를 비롯한 유명한 명승지나 유명한 사찰이 이곳에 많았기 때문에 문인들의 취향에 맞았다.


하인호夏仁虎는 『구경쇄기舊京瑣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 한족 관리들은 저택을 하사받은 고위 관료나 직접 집을 짓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외성에 살았고 대개 선무문 바깥에 살았다. 돈많은 북경 토박이들은 숭문문崇文門 바깥에 살았기 때문에 동쪽은 돈이 많고 서쪽은 관직이 높다는 말이 있었다.”  넷째, 전통적으로 관원들 중에서 미신을 믿는 자가 있어 집을 고를 때 풍수지리를 따지는 경우가 많았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청대 역사 상 유명한 인물 30명이 모두 채시구대가菜市口大街에 승장 골목繩匠胡同(현재의 채시구 거리)에서 살았다. 청대 중기의 인물인 서건학徐乾學, 홍량길洪亮吉, 필원畢沅, 진원룡陳元龍 등은 모두 이곳에 살았다. 청대 말기의 유명한 인물들 역시 이곳에 모여 살았는데 동치 연간에 황제의 스승이자 군기대신軍機大臣이었던 이홍조李鴻藻도 채시구 골목 7-11번지에 살았다. 좌종당左宗棠16번지, 공자진龔自珍1819년 채시구 골목에 위치한 휴녕회관休寧會館에 살았다.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주요 인물 중의 하나였던 유광제劉光第29번지에 살았다. 채원배蔡元培는 광서 연간에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를 지낼 때 역시 채시구 골목에 살았다.


출처 : 张宏杰,《北京日报》2015年04月27日第23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