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지역은 황하의 중하류에 위치해 있어 일찍이 “중주(中州)”, “중원(中原)”으로 불리어 왔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북경)까지 1,580리 떨어져 있는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대부터 중요성을 인정받아 왔다. 명태조 주원장은 먼저 산동을 점령한 다음 원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한 포위망으로서 하남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홍무 원년(1368) 2월, 산동을 평정한 명나라 군대는 곧장 주원장의 지시 아래 하남으로 이동했다. 바로 원나라의 장수 탈인첩목아(脫因帖木兒)가 주둔하고 있는 낙양이 목표였다. 이극이(李克彝), 좌군필(左君弼) 등은 개봉을 수비하고 있었다. 당시의 형세를 면밀히 분석한 뒤 주원장은 남북 양갈래에서 동시에 진입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남쪽 루트는 등유가 형양, 안육, 경릉 등지의 군대를 이끌고 홍무 원년 3월 1일 남양을 향해 북진하였다. 북쪽 루트는 서달이 이끄는 북벌군 즉 주력군으로 3월 초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 서진하여 개봉과 낙양을 공격하게 했다.
3월 22일, 등유의 군대가 당주(唐州)를 점령하였고 당주를 지키던 장수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3월 26일, 남양에 접근, 와점(瓦店)에서 원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다음날, 남양을 점령하였고 원나라의 장수 사극신(史克新), 장거경(張居敬) 등 26명과 사졸 1,500여 명을 사로잡았다. 남쪽 루트로 움직이던 부대가 순조롭게 목표를 달성하였으므로 이것은 북쪽에서 움직이던 주력군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원나라의 역량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달의 군대는 3월 5일 낙안을 출발하여 3월 16일 제녕(濟寧)에 도착하고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전진하였다. 그 경로에 있던 영성(永城), 귀덕(歸德), 허주(許州) 등을 점령하였고, 3월 29일 진교(陳橋)에 도착하였다. 개봉을 수비하고 있던 이극이(李克彝), 좌군필(左君弼)은 서로 미루며 싸움을 피하다가 결국 이극이가 자기 부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쳤고 좌군필은 항복하였다. 4월 8일, 서달의 군대가 호로관(虎牢關)을 출발, 서진하여 낙수 부근에서 탈인첩목아(脫因帖木兒)가 이끄는 5만 군대를 대파하였다. 양왕 아로온(阿魯溫)이 항복하였고 낙양은 마침내 명나라의 소유가 되었다. 승기를 잡은 명나라는 계속해서 숭주(嵩州), 진주(陳州), 여주(汝州) 등을 함락하였다. 4월 22일, 풍종이(馮宗異)와 강무재(康茂才) 등이 서달의 명을 따라 서진하여 섬주(陝州)를 점령하였다. 4월 26일, 다시 이동하여 동관(潼關)을 점령하였고 원나라의 장수 이사제(李思齊), 장사도(張思道)가 각기 봉상(鳳翔), 부성(鄜城)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하남은 완전히 평정되었는데, 이때까지 겨우 2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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