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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검은 역사, 하얀 이론 / 이경원 / 한길사 / 2011

by Mr. Trollope 2013. 3. 16.













20세기 후반, 그리고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탈식민주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중요한 사상가로는 누가 있는가에 관한 탐구서이다. 이른바 ‘탈식민주의 삼총사’라는 사이드, 바바, 스피박의 이론적 논쟁을 비롯하여 파농과 같은 제3세계 반식민주의 사상가들이 얘기한 내용까지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나온 탈식민주의 이론의 소개서로서는 가장 좋은 것 같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내 말은, 당연히 연구자들은 필수적으로 거쳐가겠지만 일반 학부생 정도의 대학생들이 이것을 활용하여 대화를 전개하는 것을 자주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탈식민주의란 아직도 개발도상국 단계에 머물러 있는 제3세계의 피해의식 또는 저항 논리에 불과한 것이고 21세기 선진국의 지위로 달려가는 대한민국에게는 필요없는 이론이다 라는 생각 때문인걸까. 아니면 단순히 그냥 인문학을 귀찮아하고 돈벌이에 급급한 현상황 때문인걸까. 


 하지만 탈식민주의라는 것은 아프리카 -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 처럼 '검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화를 겪었던 모든 나라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유럽의 팽창적, 파괴적 제국주의의 흐름에 영향을 받은 (거의) 전세계의 비유럽권 국가 출신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탈식민주의란건 -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위험성을 무릅쓰고서라도 한 마디 하자면 - 식민주의의 이론을 뒤집자는 말이다. 식민주의란 무엇이냐면 - 마찬가지로 -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논리이다. 예를 들어, 조선 놈들은 모래알과 같아서 개개인은 뛰어나지만 뭉치지를 못해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했다 라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언뜻 보면 한국의 국민들이 뛰어난 - 결코 열등하지 않은 - 사람들인데 운나쁘게도 식민화를 겪게 되었다 라는 변명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질지 몰라도. 사실은 일본의 식민화를 변명해주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중국은 원래 4대 발명품이 중국에서 나오고 뛰어난 고대 문명을 가진 국가였지만 높은 문화수준에 자만하여 쇄국하였기 때문에 결국 서양 문명에 역전당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서양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충격'으로 중국이 '반응'하여 깨어날 수 있었다. 라는 주장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이를테면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남긴 저주" 라던가.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식민화를 정당화한다. 열등해서 또는 열등하지는 않지만 잘못된 정책을 펴서 또는 뛰어나지만 불운한 이유에서 "결국 식민화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 이러한 상황은 이제 식민지배를 벗어난 한국의 입장에선 과거의 얘기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식민주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저런 헛소리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저런 헛소리에 교육을 받고 현재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세대들이 그 증인이다. 헛소리는 계속된다. 심지어 저렇게 성장한 기성세대들이 권력을 잡게 된 이후 그 나라의 역사 서술 속에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아프리카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이론으로 역사를 관찰하고 서술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 교과서의 논리는 패배로, 실패로, 좌절로 끝날 수 밖에 없다. 당연하다. 유럽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한국과 중국의 정책은 같은 유교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달랐다. 국가의 규모가 달랐고, 지정학적 위치가 달랐고, 국제적 지위가 달랐으며, 통치의 우선 순위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는 1천년 이상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어떻게 유럽의 역사가 동아시아 역사 서술의 기초가 될 수 있겠는가?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이러한 상황은 근대화(서구화)를 이룩하고 경제발전(서구식 자본주의) 및 과학화(서구의 계몽주의)를 통해 '극복'-한 -것으로 여겨지는 - 동아시아 3국보다도, 아프리카와 같은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탈식민주의의 저항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그들의 논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는 과거에 아프리카의 역사를 읽으려고 집어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역사가 식민화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에 넌덜머리가 났고 결국 집어던질 수 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피지배의 역사인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인가? 아니다. 그런데 왜 아프리카의 역사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주어가 되지 못하는가? 왜 아프리카의 역사책이라는 것 속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서구인의 "설명"만 가득차 있는 것인가? 물론 아프리카의 역사가 외부의 영향 아래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주체가 '검은' 사람이 아니라 '하얀' 이론이 되어도 된다면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한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럽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한국 사람'이 중심이 된 역사로 서술하고자 하는 노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은 그 저항과 투쟁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