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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지그문트 바우만 / 동녘 / 2012

by Mr. Trollope 2015. 10. 4.



옛날에 참견을 잘하는 사람을 두고 오지랖을 잘 떤다 그렇게 불렀다. 그는 이타적이다. 그는 발이 넓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기 좋아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참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이 오지랖을 견디지 못하면서 주위에서 한마디씩 던지는 것에 염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사람들을 두고, 그는 참견하기 좋아하고, 잘난척하는 사람이며, 나서지 말아야 할 곳에 나서고 내뱉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주제넘게 자신이 신경쓸 일도 아닌 일에 간섭하지 말라면서. 사실 오지라퍼는 달라진 것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졌을 뿐이다. 왜냐하면 오지라퍼가 환영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간섭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지금도 그의 일에 간섭하고 있고,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던지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요컨대 '누가' 간섭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누군가'는 간섭을 해도 되는데 그것이 '너'는 아니다. 


그를 대신한 것은 누구인가.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각자의 영역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남의 일에 일언반구 말을 보태지 않는 것-오지랖을 견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일이다. 지금도 간섭은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이제는 다른 형태를 가졌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간섭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간섭을 갈구한다. 요즈음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장소가 되는, SNS, 페이스북, 카카오 스토리, 트위터 등이 그런 공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신의 사생활, 비밀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들어주고, 여기에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일-나의 사생활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지랖에 경악하는 사람들은 "나의 사생활을 지켜주세요!" 라고 하지만, 천만에. 사생활의 진짜 재미는 꼭꼭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갖다 바치는 것에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이제는 하루의 거의 전부가 되어 버린 온갖 SNS 들. 사람들은 자신의 직장이나  학교의 정보를 부지런히 업데이트 하고 하루 중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신에게 중요한 인생의 결정들, 민감한 감정의 변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페이스북에 '열애중' 헤어지면 업데이트 한다. 이것이 사생활을 중요시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오지라퍼의 사인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타인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이, 나에게 있다고 믿을 뿐이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이기도 하고,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가 여기에 적응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우리가 혈연이나 지연 등의 이유로, 가까운 거리에 산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권한을 허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1년에 두세번 만나는 친척들이지만 피가 같다는 이유에서 명절이라야 만나는 사람들이 보자마자 학교 일에 대해서, 연애 사업에 대해서 훈수를 두는 일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드는 일이 과거에는 죄가 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제는 이런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문제에 끼어들 수 있는 자격이 이제 그들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입장권은 내가 나누어주는 것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서 오지라퍼라고 부른다.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내가 선택한 사람들이다. 요즘에 연락처를 주고 받는 일은 나의 연락처를 알려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연락처와 그의 연락처를 교환한다는 의미이다. 서로의 연락망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하여, 인생은 훨씬 복잡해졌지만, 우리의 주변은 분명 훨씬 단순해졌다.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들 중 내가 선택한 일부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같은 학과에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선택한 일부와 함께 하며, 같은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 중 일부와 만나고 시간을 보낸다. 우리의 주변은 우리가 선택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로만 내 주변을 채운 셈이다. 대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점점 멀어진다. 이해하기 쉬운 사람들은 내가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고, 그것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해하기 위해서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연락처를 지우면 그만이다. 애초에 그를 나의 연락처에 추가하기로 결정한 나의 선택을 제외하면 그렇게 사라질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은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와 공동체를 이룬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사람들은 또한 그들 각자가 선택한 또 다른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고, 그들과 나와의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어딘가에 속해 있지만, 결국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셈이다.


바우만의 표현에 따르면 주변을 엔클라베(하나의 국가의 국경 너머에 위치한 땅, 두 국가 사이에 중립적인 공간으로 작용한다)로 둘러친 것이라 한다. 이런 유예의 공간을 두는 이유는 극도의 불안감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안정감을 주는 사람들-로 주변을 둘러싸야 그제서야 안심한다. 그리고나서 뻔질나게 문자를 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고, 페이스북 업데이트를 하며, 자신의 생활을 전달하고 또 다른 사람의 소식을 전달받는 것이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의 관계는 모니터 위의 깜박임 위에, 핸드폰 스크린 위에나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사람들, 그 외의 사람들에겐 엄격하게 자신의 사생활을 차단하는 반면(오지랖의 거부), 선택한 일부 사람들에겐 자신의 사생활을 스스로 바친다(SNS). 그렇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는 불안감을 어찌할 수 없다. 


(수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