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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想昭明

션즈화(沈志华):한중관계사의 시각에서 본 사드 문제(2)

by Mr. Trollope 2017. 5. 5.

션즈화(沈志华)한중관계사의 시각에서 본 사드 문제

(从中朝关系史的角度看“萨德”问题)

2017 3 19일 대련 외국어대학 강연록


* 션즈화(沈志华)는 중국 화동사범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로 북한-중국관계, 중국-소련문제를 주로 연구한다. 중국현대사의 권위자로서 대표적인 저서로는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이 있다. 그는 최근 대련외국어대학의 한 강연에서 '북한은 중국의 잠재적인 적국'이라는 주장을 펴서 중국 내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그 강연록을 번역하였다. 다음의 기사를 확인하면 그가 주장하는 대략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누가 우리의 친구고 누가 우리의 적인가. 이것이 혁명의 첫번째 질문이라고 말했다. 이건 동북아시아의 외교에서도 가장 먼저 분명히 밝혀야 할 질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가? 피아가 분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싸우고 누구랑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친구 사이에서도 갈등은 있을 수 있고, 적과 타협하거나 협력할 수도 있다. 아니라면 마오쩌둥이 국민 내부의 갈등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 내부에도 갈등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성질은 다르다. 그렇다면 적과 친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건 목표와 이해가 같은가를 보는 것이다. 추구하는 전략과 이해가 같으면 친구이고, 동맹을 맺을 수도 있다. 동맹은 친구와는 조금 다르다. 동맹은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위기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전쟁이 끝나고 위기가 사라진다. 이 경우 계속해서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계속 동맹일 필요는 없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과 북한 사이의 동맹은 지금까지 법률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수십년이 지나 많은 것이 변했는데 중국과 북한은 아직도 동맹이란다. 이게 말이 되나? 국제관계이론에 이런 말이 있다. 영원한 이익이 있을 뿐이지 영원한 동맹은 없다. 국제 문제는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영원히 지켜야 할 것은 각자의 이익 말고는 없다.


동북아시아의 외교에서 미국과 일본의 목표는 중국을 제압하는 것이다. 중국이 발전하려면 그들은 막아서고 중국이 안정화되려면 그들은 갈등을 부추긴다. 목표와 이익이 상반되는 것이다. 이점은 매우 분명하다. 문제는 북한과 한국이다. 우리가 지금 보기에 북한과 한국 중에서 누가 중국의 친구이고 누가 중국의 적인가. 표면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이 동맹이고 미국과 일본 한국이 연합해서 북한과 대항하고 있다. 이건 냉전시대의 유산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수십년간의 시간이 흐르고 국제환경이 변화하면서 이런 상황은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내 생각에 - 현재의 상황을 놓고 볼 때북한은 중국의 잠재적인 적국이고, 한국은 중국의 친구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다.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다. 


먼저 북한 문제를 얘기하겠다. 북한을 중국의 잠재적인 적국이라고 말한 이유는, 북중 양국의 문제가 아직까지 드러나지는 않았고, 외교적으로 두 나라의 정치인 간의 회담 중에 어떠한 적대적인 표현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상의 표현을 볼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이익을 봐야 한다. 중국의 근본적인 이익은 북한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북중관계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자. 중국과 북한의 과거는 분명 동맹국이었다. 그 때 북중관계는 마오쩌둥과 김일성이라는 두 나라의 정치인이 수립한 모종의 특수한 관계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양국간의 우정은 1950년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하였을 때 만들어진 거이 아니라 1958년 중국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부분이 중요하다. 이 관계는1976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지됐다.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은 북한과 중국 사이의 우정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중국의 참전은 북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북한의 지도층들에게 특수한 감정을 만들었다. 3년동안의 전쟁 동안,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북한 인민들의 눈에 있어 고마운 존재였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은 분명 북한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어주었고 북한을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군인들에게 북한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말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전쟁과정에서 수많은 결책 과정에서 북한과 중국의 이익은 사사건건 충돌하였는데, 예를 들면 지휘권 문제라든가 철도관리권의 문제, 전쟁포로의 문제, 휴전협상과 같은 문제가 그랬다. 특히 1.4후퇴 이후 북-중 군대가 계속해서 남진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에서 두 나라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결국 스탈린이 중국의 의견을 지지했고 북한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때문에 김일성은 크게 체면을 손상하였고 이것은 북한 지도층에게 안좋은 감정으로 남았다. 중국이 정이 되어 북한이라는 모난 돌을 쪼아낸 격이었다. 1955 4, 소련과 중국의 공영매체가 북한에 대해 보도하기를, 북한 노동당의 상층계급 사이에서 이상한 이야기가 떠돈다고 하였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끝나지 못한 것은 중국 때문이고 한반도의 통일을 중국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였다. 이것이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가진 역사적 기억이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은 북한을 위해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1953년 말, 중국이 북한에게 무상으로 제공한 지원금의 규모는 소련과 동유럽의 여러 국가가 원조한 자금의 총액을 초과하였으며 전쟁 3년 동안 만들어진 모든 차관의 상환을 면제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이 김일성의 속마음을 풀어주진 못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군대가 아직도 북한의 영토 안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며 백여만의 군대가 사십여만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40여만의 군대가 북한에게 차지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1956 8월 북한과 중국이 충돌한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을 비판하였고, 이것은 북한노동동 내부의 논쟁을 격화시켰다. 김일성은 잔혹한 수단을 사용하여 연안파와 같은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북한의 수많은 간부가 축출되거나 제거되었다. 마오쩌둥은 이 일로 크게 분노하였고 소련과 합심하여 북한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시도하였다. 심지어 한때는 중국군이 북한에 남아 있는 것을 이용하여 김일성을 제어하겠다는 생각을 고려했을 정도였다. 마오쩌둥이 당시 그렇게 생각한 것은 김일성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심지어 공산진영에서 벗어나려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헝가리처럼 김일성은 동방의 나기(Nagy)가 된다면 북한은 동방의 구멍이 될 것이고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협조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흐루시초프가 동의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180도 전환하여 김일성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북한의 영토로부터 중국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결정은 김일성을 감격시켰다. 1958년 김일성은 중국에 도착하였고 마오쩌둥과의 회담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58 10월 중국군이 전부 북한에서 철수한 이후 북중관계는 일종의 특수한 밀월기에 접어들었다. 뒷날 여러가지 일이 겹치면서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고 문화대혁명이 북중관계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전체적인 관계는 변화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말을 빌리자면, ‘중국은 북한의 버팀목이니 북한에서 부족한 것이 뭐든 전부 중국이 제공할 것이다. 하다못해 북한에 사람이 필요하면 동북지방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고, 식량이 부족하면 식량을 줄 것이고 나중에 전쟁이 날 것 같으면 동북지방은 너희들에게 익숙할 것이고 여기에 사는 사람들도 너희들과 가까운 사람들이니 동북지방도 북한에게 내어주겠다할 정도였다. 때문에 뒷날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말하길 중국의 동북지방은 북한의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의 의도는 무엇일까. 나중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동북지방과 북한은 한덩어리이니 김일성을 이곳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라는 뜻이다. 결코 이 땅을 북한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마오쩌둥의 영토관념 속에서 동북지방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영토를 어떻게 가르건(백두산 천지 문제) 사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옹정 6년의 일이다. 남만왕과 운귀총독 사이에 분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안남은 지금의 베트남이다. 당시 120리에 달하는 땅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나중에 옹정제는 80리는 안남왕에게 주고 40리는 운귀총독에게 주라고 결정했다. 나중에 운귀총독이 항의했다. “소신은 상관없습니다. 40리면 40리입니다. 하지만 듣기에 안남왕이 만족하지 못하고 남은 40리도 가져가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옹정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글을 써서 내렸다. “짐은 천하를 다스리며 .. 어쩌구 저쩌구천하가 전부 나의 것이므로 어디를 어디에게 주든 내 마음이다. 안남왕은 우리의 외번이고 운귀총독은 우리의 내지이다. 그뿐이다. 구차하게 40리를 따질 이유가 있겠는가.” 이러한 내용이 내려왔을 때쯤 안남왕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사실 안남왕은 대단히 만족하였고 청나라에서 이렇게 우리를 아껴주니 80리를 청나라에게 바치겠다 우리는 앞으로 대대손손 이 땅에서 거주하면서 청나라와 영토를 갖고 다투려는 생각을 하지 않겠다 는 내용이었다. 옹정제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웃으며 다시 답을 내렸다. ‘남은 40리도 너희들이 다 가져가고 짐을 대신해 그 땅을 잘 지키도록 하라.’ 마오쩌둥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동북지방은 너희들이 가져가서 우리대신 잘 지켜라.’  이것이 마오쩌둥의 영토관이다. 때문에 그는 북한과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주 양보하는 결정을 내렸다. 백두산의 경계를 정하는 문제나 천지의 호수면을 어떻게 가를지의 문제라든지 동북지방의 인구가 건너가는 문제 등에서 중국은 모두 양보하고 따지지 않았다. 경제원조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북한에서 하나를 요구하면 중국은 그대로 따라주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주의 진영은 분열된 상태였는데 동유럽과 몽골은 전부 소련을 따르고 있었고 베트남과 북한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으며, 중국만이 홀로 버티고 있었다. 때문에 마오쩌둥은 절대 북한이 소련을 따라 중국에 대립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중국의 동북지방은 소련-몽골-북한으로 포위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때문에 마오쩌둥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방의 화약고인 한반도에서, 북한은 막무가내로 행동하면서도 수십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 북한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고 중국이 있고 두 대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때문에 당시 북한은 국방에 많은 돈을 쓸 수 있었다. 먹고 자고 입고 쓰는 것이 전부 다른 곳에서 얻어오면 되니까. 심지어 1970년대까지 북한은 한국보다 잘살았다. 마오쩌둥 시기의 북중관계가 이랬다. 북한이 원하면 전부 들어주는 이런 특수한 관계였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에게 나쁜 소리 한번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 때 북한과 중국은 친구이면서 동맹이었다. 모든 것이 괜찮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군사동맹까지 있었다. 이러한 관계였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통제할 수 있었다.


1975 4월의 일이었다. 김일성이 북경에 도착했다. 당시 베트남은 통일되었고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두번째 6.25를 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그 첫번째 단계로 중국의 마오쩌둥을 찾은 것이다. 마오쩌둥은 당연히 그가 무슨 이유로 온건지 알고 있었다. 김일성을 맞이하는 행사는 전에 없을 정도로 성대했지만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인민대회당에서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나눈 담화의 기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김일성은 속에 있는 얘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나머지 대표단을 전부 내보내고 우진우 북방부장만을 남겨두었다. 그의 목적은 두번째 6.25전쟁에 지원을 보내주고 북한이 완전한 통일을 실현시키는 것 여기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가 이 문제를 꺼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에 대해 떠들거나 땅에 대해 떠들거나 한번은 김일성의 건강에 대해서 묻는가 하면 절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조급해져서 금새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되돌아가려고 하면 마오쩌둥은 또 부드럽게 화제를 돌리면서 나이를 먹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회담이 길어졌으니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끝내버리고 김일성이 생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막아버렸다. 중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소련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 북한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 중국이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의 입장이었다. 북한이 여러가지 문제에서 중국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은 북한이 중국의 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었고 큰 줄기에서는 결국 중국의 뜻이 중요했다.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이 상황은 크게 변했다. 무엇보다도 냉전이 종결된 것이 컸다. 마오쩌둥과 김일성 사이에 만들어진 특수한 관계도 끝이 났다. 북중관계는 철저하게 바뀌었는데 이것은 아래의 세가지 분야에서 확인된다.


첫번째, 외교분야를 보자. 70년대초 중미관계가 좋아진 이후 북중동맹의 외교적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 북중동맹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제 중미관계가 좋아지게 되자 북한과 중국의 외교 전략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북한은 계속해서 소련을 끌여들여 미국과 대항하고자 했지만 중국은 미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막아내고자 했으니 외교적인 지향점이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첫째 마오쩌둥이 여전히 공산주의 진영의 중요인물이었고 미국은 여전히 공산혁명의 타도대상이었다. 둘째 중국은 미국과 담판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이익을 고려하고 북한에 가해지는 압력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면 유엔의 한반도통일위원회를 취소시키고 유엔연합군사령부를 해산시키는 것 등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이시기에는시기에는 달랐다. 중미관계가 급격히 좋아졌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마오쩌둥에게 있어서 중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하나의 책략이었다면 덩샤오핑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정책 문제였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추구했고 그것은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서구의 자본과 기술, 판매시장이 필요했고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덩샤오핑에게 있어서 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함께 했던 시절은 궁핍한 시절이었고 미국과 함께할 미래는 번영의 시절이기 때문에 개혁개방은 반드시 미국을 통해야만 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1985년 중소관계가 정상화되었고 중미관계도 나날이 좋아졌다. 북중관계는 계속해서 멀어졌고 두 나라 사이에서 일치된 전략이란건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는 문제가 되었다.


두번째는 경제분야이다. 과거 북중 사이의 경제는 대단히 긴밀했고 프롤레타리아계급혁명의 핵심이었다. 마오쩌둥의 말에 따르면 두 나라 사이에는 정치적인 문제를 논할 뿐이지 경제적인 문제는 논할 필요도 없다. 중국은 소련과 다르다 소련은 북한에게 무기를 주고 돈을 주지는 않았지만 중국은 무기상이 아니다. 우리는 장사를 하려는게 아니다.’ 덩샤오핑 시기가 되자 모든 것이 변했다. 시장경제에서는 돈계산이 빠질 수 없다. 기업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회계가 분명해야 했다. 1983년 북한에서 전투기를 중국으로 보내 수리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 비행기는 마오쩌둥이 북한에게 무상으로 증여한 것이었다. 비행기를 보낸지 18년이 지났기 때문에 수리할 곳이 많았다. 중국 션양의 비행기공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수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너희들은 먼저 돈을 내야 한다. 북한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비행기는 마오쩌둥이 무상으로 증여한 것이다. 그런데 수리하는데 돈이 든다고? 우리는 형제가 아니었단 말인가? 공장측에서는 거절했다. 우리는 이제 기업이고 돈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결국 이 문제는 외교부와 항공부까지 올라갔다. 마지막에는 덩샤오핑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는데, 결과가 어땠을 것 같나? 덩샤오핑은 다음 두 줄로 답했다. “우리도 상인이다. 상인은 돈을 받아야 한다. - 덩샤오핑이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덩샤오핑이시기에도시기에도 북한에게 원조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금액은 급격히 감소했다. 시장원리에 따라 일을 하자면 프롤레타리아계급혁명이란 것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따라서 북중관계의 특수한 경제적 관계라는 것은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은 정치 분야이다.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자, 북중관계의 정치적 기초는 철저하게 분쇄되었다. 1990년 소련이 한국과 수교하게 되자, 북한은 크게 놀랐다. 9, 김일성은 션양으로 가서 덩샤오핑과 장쩌민을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고르파초프가 한국과 수교하기로 했다. 이것은 북한에게 큰 문제라는 얘기였다. 원래 북한에게는 두가지 뒷배경이 있었다. 하나는 소련 다른 하나는 중국이다. 이제껏 두 나라는 북한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제 소련이 북한을 신경쓰지 않겠다고 하고 갑자기 한국과 손을 잡기로 한다는데 그러면 북한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때문에 김일성은 당시 무슨 일이 있어도 중국은 한국과 손을 잡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만약 중국과 한국이 수교하게 되면 북한은 고립이 된다고. 미국이 북한을 승인하기 전에는 중국은 한국과 정식으로 수교할 수는 없었다. 당시 덩샤오핑과 장쩌민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이 장담했다.장사는 해야 하니까 잘해봤자 서울에 상공회의소를 차리는 것 정도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중국이 절대 한국과 손을 잡을 일이 없다. 하지만 2년도 지나기 전에 중국과 한국이 수교를 선언했다.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89년의 개혁개방 이후 미국을 선두로 하는 서방의 국가들은 중국을 고립시키고 있었고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정책을 유지하는 와중에 이러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돌파구가 필요했고 한국이 필요했다. 하지만 김일성이 보기에 이것은 중국이 북한을 팔아넘긴 것이었다.  


1992년이 되었을 때 냉전은 거진 종결되었고 과거의 북중관계를 만든 선배 정치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국제관계에서도 큰 변화가 생겼다. 외교 정치 경제 어느 분야를 살펴보더라도 북한과 중국의 이익은 같을 수 없었고 동맹의 기초는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북중동맹 역시 휴짓조각에 불과했다. 이 때 북중관계는 일반적인, 정상적인 두 이웃국가의 관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렇게 평범한 관계조차 점차 적대적인 관계로 변화했다. 북한이 핵개발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