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台想昭明

남을 차별하는 인간들

by Mr. Trollope 2018. 2. 3.
<성경>에 이야기 하나. <판관기>(또는 <사사기>) 12장이다.

 

길앗인들은 에프라임으로 가는 요르단 건널목들을 점령하였다. 도망가는 에프라임인들이 “강을 건너게 해주시오.” 하면, 길앗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너는 에프라임인이냐?” 그래서 “아니요.” 하고 대답하면, 그에게 ‘쉬뽈렛’이라는 단어를 말해보라 하였다. 하지만 에프라임 사람은 그 단어를 제대로 발음할 수 없기 때문에 ‘시뽈렛’이라고 말했고, 그러면 길앗인들은 그를 붙잡아 요르단 강 여울목에서 때려죽였다. 당시 에프라임 사람 4만 2천 명이 죽었다.

 

쉬뽈렛(Schibbolet)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곡식의 이삭’을 뜻한다. 에프라임 사람들은 쉬뽈렛을 시뽈렛(Sibbolet)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 사람이 에프라임 사람이기를 원했는지 길앗 사람이기를 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어 하나를 제대로 발음하는 것, 그것이 강을 건너도 되는 사람과 건널 수 없는 사람을 결정했다. 단어 하나가, 같은 편인지 다른 편인지, 살 수 있는 사람과 죽어야 할 사람을 결정했다.

 

우리나라 사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역에 큰 지진이 발생했고 여기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일본 당국은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민심의 동요와 소란을 막고 불만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재난을 틈타 사회주의자와 결탁해서 방화와 테러 강도 짓을 계획하고 있다’,‘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일본인을 습격한다’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우파의 선동에 넘어간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을 찾아다니면서 학살했다. 일본 경찰과 군대도 여기에 가담했다.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보면 ‘주고엔고줏센(十五円五十銭, 15원 50전)’이나 ‘다이콘(大根, 무)’같은 단어를 발음해보라고 시키고 발음이 이상하면 곧바로 죽였다. 이 때 학살된 한국인이 6천명이었다고 하는데 2만 3천여 명에 달한다는 보고서도 있다. 영화 <박열>을 본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이번엔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명사>에 나오는 일화 몇 개가 있다. 가정 연간에 황관(黄绾)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수보 양일청(杨一清)은 그가 ‘남방 발음’을 한다는 이유로 경연에 참가하지 못하게 했다. 만력 연간에 이정기(李廷机)는 복건 출신인데 복건 사람의 말이 알아듣기 힘들다고 해서 2백년간 내각에 복건 사람이 없었다가 이정기 때 비로소 복건 사람이 내각에 들어갔다고 한다. 원대 정사초(郑思肖)란 사람은 송나라가 망하자 자신은 북쪽 사람과는 교류를 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그 자리에서 발음이 이상한 사람을 보면 바로 잡아 끌어냈다고 한다. 오늘날‘쑤베이(蘇北)인’이라는 말은 근대 상해로 이주한 강소성 북부 지역 출신을 가리킨다. 그들은 상해에 살던 사람들과는 다른, 구분되는 말투를 사용하기 때문에 손쉽게 구분되었다. 이런 차별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웃기는건 남경에서도 비슷하게 쑤베이인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최근 충청남도에서 차별금지에 관한 조례를 폐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도록 한 규정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종교적 이유에서든 어쨌든, 그것은 한 사회에 '올바른 것'으로 인정되는 한가지 기준과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에 가하는 폭력을 정당화 하는 배제와 차별의 암호다. ‘쉬뽈렛’.

 

다르다는 것은 곧 틀렸다는 주장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발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공동임대주택에 산다고 해서 차별하고, 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고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한다. 그리고 이제는 차별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사람까지 차별한다. 상관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한번 차별이 정당화 된다면, 그 이유는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으니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차별하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에게나 있다. 그것은 당연하다. 이유가 뭐든지, 어떠한 자의적인 기준이든, 지역이든 성별이든, 종교든 그게 이유가 된다면 상관없다. 다르다는 이유는 얼마든지 그 사람을 배제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왜냐면 인간은 자기 아래에 다른 누군가가 있기만 하다면 지배를 당한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란다. 루소도 그렇게 말했고 존 애덤스도 그렇게 말했다. 상상이 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표준어를 구사하고 특정 지역에서 태어나 얼마 이상의 소득수준을 갖고 얼마 이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얼마나 훌륭한 조상을 두었는지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차례로 늘어선 사회 말이다. 끔찍하다.

 

혹 차별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본성은 모든 인간에게 있지만 그것에 굴복하고 몸을 맡길 때 우리는 금수에 불과하게 된다. 명말청초를 살았던 왕부지(王夫之)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믿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