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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想昭明

일본과의 경제갈등과 관련된 한가지 문제

by Mr. Trollope 2019. 8. 5.

과거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에 나와서 아침조회란 걸 했다. 운동장에 줄을 맞춰 서 있으면 국민의례를 하고 마지막에는 교장선생님이 “사랑하는 사랑하는.. 온곡 초등학교.. 온곡 초등학교.. 학생 학생.. 여러분 여러분..” 같은 훈화말씀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그런 행사다. 훈화말씀이란 것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당시 내가 교장선생님 훈화보다 더 싫어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학생들이 줄을 맞춰 서 있는데 선생님들은 줄이 완성된 이후에도 이리 저리 돌아다니거나, 불량한 자세로 서 있거나, 다른 선생님과 귓속말을 주고받는다거나 하는 모습이었다. 난 이게 너무 싫었다. 학교에서 수련원 같은 곳을 갈 때도 그렇다. 학생들은 규칙을 지켜야 하는데 교사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람과 규칙의 적용을 받지 않는 사람이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군대에도 있다. 어떤 규칙은 이등병부터 상병까지 어떤 규칙은 이등병부터 일병까지 적용이 되는 그런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꼬우면 너도 진급하던지. 일정한 수준 이상은 규칙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천룡인이 된다. 문제 해결. 끝.

 

공자가 말했다. 예禮는 서인에게 적용이 되지 않고 형刑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는다. 공자의 말이 대개 그러하듯 이 역시 극도로 괴상하게 해석되곤 한다. 오늘날에 통용되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예의는 윗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규칙이고, 형벌은 아랫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다. 그리고 이 규칙이 동양의 전 역사에 고스란히 적용되는 보편적인 규칙인 것처럼 설명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니, 공자가 살았던 수천년 전에는 그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16세기의 중국에서 어느정도 이와 달리 법치주의가 작동했다고 믿는다. 법제사란 것은 너무 어려워서,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관심만 계속 갖고 있었는데 최근 (소수지만) 몇몇 연구자들이 내놓는 성과를 보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당시에도 법치주의란 것이 우습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개념은 아니었다. 그런데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그게 뭐냐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 공자의 말이 난도질 당했던 것처럼, 그들은 法治란 개념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쏙 빼와서 해석한다. 규칙은 적용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법치를 부르짖고 법치를 주장하지만 자신들은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 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 세월호의 선장은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자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몰래 누구보다도 먼저 도망쳤다.

 

일본과의 경제문제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제문제에서는 힘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강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약자는 여기에 따라야 한다. 일본은 강자이기 때문에 부당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해도 된다 하지만 한국은 약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렇게 말한다. 힘의 논리란 말에 대해 한번 생각해봤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논리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해도 돼. 너는 하면 안돼. 요즘엔 부모도 이러면 안된다고 가르치는데.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임의의 기준선에 따라 규칙이 적용되고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유무가 결정한다고 하니까, 지나치게 노골적인 것이 오히려 솔직해서 좋겠다도 싶다. 힘의 논리가 무논리이건 아니건, 그게 맞다고 주장하는데 뭐 어쩌겠나 싶지만. 국제정치 부분은 내가 일자무식이니 길게 말하지 않겠다. 그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 유일한 답은 아니다. 한가지만 대보겠다. 냉전시기에 프랑스가 채택했던 비례억지전략이란게 있다. 프랑스는 소련에 비해 핵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처럼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전략을 사용할 수 없었다. 비례억지전략이란, 간단히 말해, 내가 죽더라도 네놈 쌍코피는 터뜨리고 죽겠다 그리고 내가 죽더라도 다른 큰형님이 와서 네놈 모가지를 따버릴 거다 란 계획이다. 이 계획의 핵심은 미리 상대방에게 이 전략을 알려주는 것 그리고 전지구적 핵전쟁으로 이어지는 외교적 연환계에 있다. 프랑스를 공격하는 누군가(아마 소련)는 수도(아마 모스크바)의 초토화를 포함해 나아가 전국토의 파괴로 이어지는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고 그 결과 프랑스에 대한 핵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어떤가.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이른바 힘의 논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강자의 전략이라면 이것이 약자의 전략이다. 어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비록 더 많이 얻어맞게 될지 몰라도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메시지였다. 이것은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저급한 사생결단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민국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올 다른 누군가에게 미리 보내는 경고 메시지다. 어떤가. 내가 보기엔 굳이 힘의 논리란 걸 따르지 않고도 다른 논리가 있는 것 같은데.

 

힘에 따라 규칙이 적용되거나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힘의 논리란 것만 옳다고 보겠지만.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수백년 전에도, 법의 구속은 사대부에게 미치지 못하기는 커녕, 황제조차도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것이 현재와 비교했을 때 불완전한지는 몰라도 수천년전에 비하면 엄청난 도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법치주의를 생각해보자. 3천년 전부터 수백년전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수준이 올라가는 상승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힘의 논리같은 그런건 동굴 속 주민들이나 할 법한 소리인 것이다. 3천년 동안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는 무수한 전략이 개발되었다. 힘을 가진 자만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런데 누군가는 아직도 정신이 한 3천년 전에 멈춰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