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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4

丁卯之役(1627.1-1627.4)과 정묘호란 정묘호란은 천계 7년(1627) 1월부터 4월 사이에 있었던 중국(명)-후금-한국(조선) 사이에 있었던 보다 큰 전쟁의 일부분이며, 그 중 조선의 영토 안에서 일어난 전쟁만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이 전쟁은, 후금의 입장에서, 명조가 동강진(東江鎭)에 배치한 모문룡(毛文龍)의 부대를 제거하고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후금은 겨울철이 되어 강이 얼어붙는 시기를 틈타 조선인의 협력 아래에 10만의 군사를 동원, 동강진을 공격하였지만 성과가 크지 않았다. 이에 방향을 전환하여 조선을 공격하였고(정묘호란) 조선의 북방을 약탈하였다. 이에 명조의 군대가 구원하기 위해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여 압록강 북쪽 연안에서 후금군과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서 후금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많은 사상자를.. 2012. 3. 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이유 숭정 2년(1629) 12월, 계요독사이자 병부상서인, 명나라의 최고 군사지휘관인 원숭환(袁崇煥)이 체포되었다. 심문은 수개월간 이어졌다. 마침내 숭정 3년(1630) 8월 16일 숭정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원숭환은 황제의 명령이 있음에도 이를 완수하지 못했고, 황제의 신뢰를 믿고 오히려 기만했으며, 적에게 식량을 팔았고, 적의 계략에 속아 장수를 베었으며, 적을 오랫동안 쫓고도 나서서 싸우지 않았고, 원군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는데 이를 흩어뜨려 적이 (수도의) 성 아래에 이르게 하였다. 또 몰래 라마승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등의 죄를 저질렀다. .... 이하 생략 (諭以袁崇煥付托不效,專恃欺隱,以市米則資盜,以謀款則斬帥,縱敵長驅,頓兵不戰,援兵四集,盡行遣散,及兵薄城下,又潛攜喇嘛,堅請入城.. 2012. 2. 8.
명말의 환관 위충현 위충현(魏忠賢) (1568-1627) : 본명은 위사(魏四), 본래 肅寧(지금의 하북성 남부) 사람이다. 명말의 유명한 환관으로 천계제의 총애를 받아 동창과 금의위를 장악하고, 문인 집단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숭정제가 즉위하자 명을 받고 좌천되었고, 가는 길 위에서 자살했다. 명사(明史) 권305 환관전2에 그의 전이 있다. 그의 악행이야 뭐 너무 유명하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고 다만 그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의 일과, 그리고 그 후의 나머지에 대한 내용만 할까 한다. 입궁 그는 일찍이 결혼한 적이 있는데 부인의 성은 풍씨였고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싸움에 소질이 있어, 왼손과 오른손 모두 능숙하게 활을 쏠 줄 알았다. 집안이 빈궁하였으나 도박을 무척 좋아하여 많은 돈을 .. 2012. 2. 6.
청대 토지세의 재정적 중요도 Yeh-Chien Wang, "The Fiscal Importance of the Land Tax During the Ch'ing Period",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30, No. 4, 1971 토지세는 농경 국가에게 정부 재정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예를 들어 조세 기록을 갱신하는 어려움, 인플레이션일 때 토지세의 탄력성 부족, 다른 유효한 조세 수입의 증가) 다른 세금에 비해 토지세의 중요도는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감소하게 된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경우를 예를 들어, 막부 재정은 그 통치 전반기에는 세입의 대부분을 토지세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840년대 초에는 세금의 절반 이상이 농업이 아닌 곳에서 나왔다. 이에 더해, 영.. 2011. 6. 18.